항목 ID | GC05500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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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院里 |
이칭/별칭 | 원마을,원동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조선 시대 제생원이 있었던 마을로서 원마을 또는 원동이라 부른다.
[명칭 유래]
원(院)은 고려 시대부터 여행자들이 먼 길을 가면 자고 가거나 쉬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곳이다. 옛날에는 약 2㎞[5리]마다 정자가 있고, 4㎞[10리]마다 원이 있으며 12㎞[30리] 내지 16㎞[40리]마다 역이 있었다. 원리는 조선 시대에 제생원(濟生院)이 있었던 곳이어서 원리가 되었다. 제생원은 지금은 폐교된 청도 동부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원리에는 관곡[큰마을]과 지당 마을, 주막거리가 있다. 관곡(冠谷)은 갓골이라고도 하며 원리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주막거리는 뒷날 신작로가 생기고 원 또한 폐쇄되고 나서 길을 따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자고 가거나, 쉬어 갈 수 있는 상업적인 주막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지당 마을은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원(院)에 관련된 사람들의 개인집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하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원동이라 하여 대성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40년 대성면이 청도면으로 개명하면서 청도면 원동이 되었고, 1949년 청도면이 청도읍으로 승격하면서 청도읍 원동이 되었다. 1988년에 원동에서 원리를 이름을 바꾸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큰마에는 적천사가 한창 번창했을 때 승려들의 생활을 위해 쌀을 도정하던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세(寺勢)가 아무리 강했어도 승려들을 위한 도정을 마을에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원에 사용되는 미곡을 도정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때 원을 관리하던 주인이 승려들이어서 지금도 절에서 살림을 맡아 하는 사람을 원주라고 한다. 일반인을 원주로 들여놓으니 원에서 사용되는 모든 생활용품을 개인의 가정으로 가져가는 폐해가 발생했기에 가족이 없는 승려로 하여금 원주를 살게 했다고 하는 것이 이 유래이다. 갑오경장 이후 생활이 현대화되면서 원도 폐쇄가 되고 그곳에 학교를 세웠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관(官)의 토지를 이용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자연 환경]
오산(鰲山)[남산]에서 내려온 줄기가 봉수대에서 갈리면서 대포산을 잇는 등성이와 다름재를 잇는 등성이가 만든 계곡에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적천사에서 발원한 이 계곡을 10리 계곡이라 하여 길이가 약 4.5㎞에 이른다. 서·남·북쪽이 막히고 동쪽으로 트여 있다.
[현황]
2012년 현재 면적은 5.57㎢이며, 총 93가구에 230명[남자 117명, 여자 11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청도읍 거연리, 남쪽은 청도읍 상리·신도리, 북쪽은 청도읍 월곡리·화양읍 동천리·범곡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 관곡과 지당 마을이 있으며 주막거리가 있다.
경작지가 대부분 다랑논을 이루고 있지만 깊은 골짜기로 인하여 수량(水量)은 적지 않은 편이다.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일구어져 있으며 높은 지역은 밤나무를 식재하여, 원동 밤[栗]이 유명하다. 낮은 지역은 감과 복숭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마을 앞 주막거리와 원앞들은 대부분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 원리 동쪽으로 경부선 철도와 중앙 고속 도로, 국도 25호선이 지나고 있다.
천년 고찰 적천사가 있어 문화재로는 보물 제1432호인 적천사 괘불탱 및 지주,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153호인 적천사 목조 사천왕 의좌상,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21호인 적천사 대웅전이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402호인 청도 적천사 은행나무가 있다.
적천사 대웅전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의 집합 장소로 알려져 일본인들에 의해 화재로 소실되고 산내 암자였던 옥련암에서 옮겨와 지은 건물이다. 이때 누각과 적묵당이 소실되었는데, 적묵당은 백련암을 옮겨와 지었다가 1996년에 중건하였고, 누각인 무차루는 1993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