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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항리 봉암 산신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019
한자 鳳項里鳳岩山神祭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 1리 봉암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산제당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봉항 1리 봉암 마을 뒤편 망골산
성격 민간 의례|동제
의례 시기/일시 정월 초[음력 1월 초]
신당/신체 산제당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봉암 1리 봉암에서 매년 정월 초에 농사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

[개설]

천안시 병천면 봉암 1리는 서근과 봉암, 이렇게 두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예전에는 전주 이씨, 경주 김씨, 광산 김씨, 중추 지씨 등 네 가지 성씨가 주축을 이루고 90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이었다. 1980년대 이후 이농 현상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현재 55호가 살고 있다.

두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에 길일을 택하여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냈다. 이를 위해 마을에서 한학이 출중했던 지용희[1993년에 61세] 씨가 부정이 없고 깨끗한 주민을 대상으로 길일인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을 가려 음식을 준비할 유사(有司)와 제관(祭官)을 한 사람씩 선정하였다. 제관과 유사가 정해지면 마을 입구에 왼새끼로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또한 제관의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폈다. 이날부터 제관은 문밖출입을 하지 않은 채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하며 치성을 드린다.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도 육류나 비린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 심지어 젓갈이 들어간 음식조차 먹지 않았다.

산제의 비용은 동계의 기금으로 충당했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과과, 백설기, 메, 통북어, 술 등을 준비했으며 재정이 넉넉할 때는 통돼지를 잡아서 올리기도 했다.

[연원 및 변천]

봉항리 봉암 산신제의 연원은 알 수 없다. 주민들의 말로는 수백 년 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려고 산신제를 지내 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동네 어른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면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서근 마을의 경우 천주교 성공회가 들어오면서 1970년대 즈음에 이미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은 마을 뒤편 망골산 중턱에 있다. 본래는 제를 올리는 터만 있었으나 1970년 즈음에 당집을 건립했다. 부엌 한 칸, 방 한 칸으로 된 산제당은 함석으로 지붕을 얹었고 규모는 13㎡ 남짓한 크기이다. 산제당 안에는 산신도나 위패를 봉안하지 않았고 떡시루와 제기 등을 보관하고 있다.

산제당 곁에는 세 개의 산제샘이 있는데 이를 상탕·중탕·하탕이라 불렀다. 샘들은 산신제를 지낼 때 용도가 각각 다른데 상탕은 메를 짓고 떡시루를 찌는 물로, 중탕은 제물의 조리와 음식의 설거지를 하는 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하탕에서는 산신제 당일 제관과 축관이 목욕재계를 하였다.

[절차]

봉항리 봉암 산신제 당일 부정하지 않은 주민들은 아침 일찍 올라가서 산제당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다. 아울러 세 개의 샘을 품고 떡을 익히고 메를 지을 땔나무를 해 놓는다. 통돼지를 잡는 해에는 미리 돼지를 도살하여 지게에 지고 올라갔다. 제관과 축관은 제물 준비가 갖추어지면 오후 세 시께에 짐꾼 몇 사람을 대동하고 산제당으로 향한다. 제당에 도착하면 하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상탕의 물을 길어 메를 짓고 떡을 한다.

산신제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 시작된다. 제당에 제물이 차려지면 분향(焚香)·강신(降神)·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소지(燒紙)의 순으로 제를 지낸다. 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흰 종이를 사르는 절차인 소지는 가장 먼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 소지를 불사른다. 이어서 제관 소지와 축관 소지를 올리고 나서 고사 덕담(告祀德談)을 하며 주민들의 소지를 모아 올린다.

[부대 행사]

산신제를 마치면 음식을 준비한 유사의 집이나 마을 회관에서 마을 잔치를 베풀었다. 특히 산신제를 지낸 떡은 재수떡이라 하여 서로 한 조각이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경쟁을 벌였다.

[현황]

봉항리 봉암 산신제는 2000년 즈음에 중단되었다. 산신제를 지성으로 모시던 지용희 씨가 타개하면서 더는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산신제를 모시려면 겨울에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하기에 제의 전통을 이어받을 만한 사람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신제를 잘못 지내면 반드시 탈이 난다 하여 서로 제관이 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산제에 대한 믿음도 시들해져 중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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