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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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孝祠 |
이칭/별칭 | 고흥 유씨 위패 사당,유청신 가묘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제연 |
현 소재지 | 충효사 -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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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당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에 있는 조선 시대 사당.
[개설]
유청신(柳淸臣)[1257~1329]은 고려 중기 원 간섭기에 외교관으로 활약하였던 인물이다. 비록 고향은 전라도 장흥이지만 원나라에서 들여 온 호두나무를 천안의 고찰 광덕사에 심었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말년에는 고려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원에서 사망하였고, 후손들은 광덕사 일대에서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오게 되었다. 충효사(忠孝祠)는 후손들이 건립한 유청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위치]
천안시 광덕면 매당 3리 당하 마을 회관에서 남서쪽 80m 전방 유사당골 입구에 충효사와 유청신 신도비가 함께 있다.
[변천]
고흥 유씨의 족보에는 광덕면 매당리 당께울[堂下里] 충효산에 유청신이 살았고, 그의 부조 묘와 정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청신이 실제 이곳에 거주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유청신이 중국 원나라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후손들이 매당리 일대에 거주하게 된 이유로 유청신의 전장(田莊)이 광덕사 주변에 분포했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충효사는 ‘유청신 가묘(家廟)’ 또는 ‘고흥 유씨 위패 사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충효사는 유청신의 부조 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가에서 유청신에게 부조지전(不祧之典)을 허락한 기록을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유청신의 사당을 모시게 된 연원에 대해서는 설화가 전해진다.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천안의 민담과 설화』에 따르면, “유청신의 사당이 이곳 당께울에 있는데 중국에서 영밀공 혼을 모시고 올 때 ‘오십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을 하고, 또 물으면 대답하고 하면서 왔다. 이곳에서 대답이 끝났으므로 이곳에 사당을 모시게 되었다고 전하여 온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밖에 유청신의 사당에 참배하면서 제문에 “공의 억울함을 신원하오니 저의 소원도 풀어 주시오.”라고 하면 소원이 성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충효사에는 1967년에 송원빈(宋元彬)이 쓴 「유영밀 공 묘우 중건기(柳英密公廟宇重建記)」가 전해진다. 중건기에는 ‘부조 묘가 태화산 충효봉 아래에 있어서 7백여 년간 후손이 제사를 지내 왔는데 건물이 낡고 무너져 중수를 하게 되었으니, 그 비용을 대고 중수를 주관한 이들은 후손 중봉(重鳳), 희석(熙錫), 성석(聖錫)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형태]
충효사는 솟을삼문과 1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과 전 퇴칸을 두고 팔작지붕을 올렸다. 정면 중앙에 ‘충효사(忠孝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주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는 솟을삼문을 시설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청신이 천안의 광덕사에 호두나무를 심은 이후 800여 년간 천안은 국내 호두의 산지로 이름을 떨쳤고 현대에는 호두과자로도 유명하다. 천안 지역에서는 유청신에 대한 흥미로운 설화도 전해지고, 가묘와 신도비, 호두 전래 사적비 등을 건립하여 유청신을 존숭하는 마음을 지켜 나가고 있다. 따라서 충효사는 후손이 조상을 제사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천안시를 상징하는 인물에 관한 유적으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