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020 |
---|---|
한자 | 兪彦謙 |
이칭/별칭 | 겸지(謙之)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종식 |
출생 시기/일시 | 1496년 - 유언겸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540년 - 유언겸 사직서 참봉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48년 - 유언겸 인제 현감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49년 - 유언겸 형조 정랑에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58년 - 유언겸 사망 |
묘소|단소 | 유언겸 묘소 -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남관리 공수동 |
사당|배향지 | 육현사 -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풍서 5리 |
정려각 | 유언겸 정려각 -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남관리 공수동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창원(昌原) |
[정의]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겸지(謙之)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정랑을 지낸 유백순(兪伯純)이고,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유보정(兪輔鼎), 어머니는 이구린(李龜鱗)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유언겸(兪彦謙)[1496~1558]은 풍세면 남관리에서 태어났으며, 효행으로 1540년(중종 35)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다가 1543년(중종 38)에 6품직에 제수되었다. 1548년(명종 3)에 인제 현감을 거쳐 1549년에 형조 정랑에 올랐고, 그 뒤 용담 현감·신계 현령·문화 현령을 역임하였다.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청렴하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백성 돌보기를 자식같이 하여 백성들이 마음속부터 따르고 온갖 폐단이 바로잡혔다고 한다.
유언겸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초상의 예를 다하여 3년 동안 극진하게 슬퍼했다. 어머니를 모실 때도 비록 가난하지만 사방에서 옷과 음식을 구하여 정성스럽게 봉양하였다. 아내가 직접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였으며, 자신도 스스로 농사짓고 음식을 봉양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는 장례와 제사를 예문과 똑같이 하였고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유언겸의 효행과 관련해서는 호랑이와 얽힌 일화가 전한다. 유언겸이 시묘를 살 때 두 마리의 호랑이가 와서 지켰는데, 아침과 저녁에 제사에 올린 음식을 물리고 나서 두 마리 호랑이와 함께 먹었다고 한다. 어느 날 저녁에 전염병에 걸린 승려가 여막에서 하룻밤 자기를 청하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울부짖어 쫒아냈으며, 어느 날 밤에 도둑이 여막에 들어와 곡식을 약탈해 짊어지고 갈 때에도 호랑이가 포효하여 도적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 이웃 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제사를 중단할 정도였는데 호랑이가 크게 울어대더니 이튿날에 다들 병이 나았으며, 샘물이 멀어서 물을 길어 오는 길이 아주 험난하였는데 깊이 생각에 잠겨 묵묵히 기도하였더니 샘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탈상할 때에 이르러서 호랑이는 떠나고 샘물도 역시 말랐다고 한다.
[묘소]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남관리 계숙산(桂肅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유언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조정에서는 효자 정문을 내리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였으며, 관직을 제수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천안의 육현사(六賢祀)와 문화의 충효사(忠孝祀)에 배향되어 있다. 천안시 풍세면 남관리 공수동에 유언겸 정려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