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족의 힘으로 일군 장정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002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행묵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 있는 진주 강씨 종족 마을.

[종족의 힘으로 만든 장정마을]

장정마을금강 변에 있는 진주 강씨(晋州 姜氏) 종족 마을이다. 진주 강씨장하리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이후 19세기 이르러 종족 마을로서의 특징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장하리는 더욱 역동적으로 변하였다. 대종교와 민족 운동 지도자를 동시 배출하였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웃 마을과 갈등을 벌였다. 그 과정 속에서 장정마을 주민들은 더욱더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장정마을은 근대화와 부촌화를 동시에 이루어 낸 몇 안되는 마을 중 하나이다. 장하리가 부촌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공동체 의식이다. 장정마을에 있는 ‘검신들’이라는 이름의 들판은 금강 본류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할 수밖에 없는 충적토이다. 제방과 근대적 배수로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금강 본류의 범람으로 주민들의 생계 활동이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금강과 같은 자연 재해를 극복한 장정마을은 혈연관계와 공동체 의식을 통하여 오늘까지 사회적 혹은 경제적 번영의 기초를 이루었다.

20세기 초반 장정마을에서 우리나라의 대종교와 부여 지역의 민족 운동의 큰 줄기를 차지하는 인물이 배출되었다. 장정마을 출신의 강석기강석기의 아들인 강진구, 강철구, 강용구가 모두 대종교의 발전에 헌신하였다. 모두 만주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 장정마을 출신의 진주 강씨 중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인물이 또한 많다. 부여 지역 출신의 민족 운동가 중에서 장정마을과 인적 유대나 혹은 사상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장정마을에서 일찍부터 근대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대한제국기 강석기가 마을에 세운 천영학교와 일제 강점기 강진구가 운영하였던 광일의숙은 부여 지역의 선도적인 근대 학교로서 대표적인 민중 야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장정마을에 큰 시련이 닥쳤다. 전통적으로 신분이 달랐던 이웃 마을과의 내적 갈등이 6·25 전쟁을 통하여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 낸 모두의 비극이었다. 6·25 전쟁장정마을과 주변 이웃 마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었다. 초등학교에서 매년 진행하는 가을운동회가 되면 마을 주민 간의 세력 각축장이 벌어졌고, 씨름 경기는 운동이 아닌 전쟁과 같았다. 그러나 1960년대 한 마을 주민의 발의로 만들어진 강호동지회는 어려운 환경과 역사적 상처 속에서 장정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강호동지회를 통하여 장정마을 주민들은 이웃 마을과의 친목을 도모하고 공동의 자연 재해인 금강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오랜 노력 끝에 인공 제방이 축조되었고 토지는 비옥해졌다. 20세기 후반 이래 장정마을의 경제적 풍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장정마을의 과거 유산은 열학한 자연환경, 불리한 사회적 조건, 부족한 경제 자산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장정마을 주민들은 강인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난관을 극복하여 갔다. 고난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종족적 단합을 보여 주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온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을 장정마을도 피할 수 없었다. 인구는 줄고 고령화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힘든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장정마을의 미래는 밝지 않다. 냉혹한 한국 농촌 사회 속에서 현실은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정마을은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의 발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점은 더 넓은 지역 사회와의 의식 공유를 통하여 발전적으로 계승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장정마을의 입지와 경관 변화]

장정마을진주 강씨가 세거를 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처음에 진주 강씨는 후포리에 정착을 하였으나 이후 주변 마을로 세거지를 확장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에 후포장정의 장(長)과 하곡마을의 하(蝦)를 빌려와 장하리가 되었다. 지금도 장정마을장하리에 속한다. 1930년대 조사에 따르면 장정마을의 마을 주민 중에서 약 90% 정도가 진주 강씨 문중 구성원이라고 한다. 장정마을진주 강씨 문중은 부여군 내에서 두 번째 규모로 큰 마을이었다. 마을의 가옥은 태성산을 배후로 하여 동쪽 산록부에 있다. 장정마을 앞에는 금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충적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장정마을 앞의 충적지는 농경지로 개간되어 오다가 최근에는 시설 영농이 행해지고 있다. 태성산은 장하리의 주산으로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임천 성흥산성에서 부여로 가능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

장정마을에서 버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그 이전에는 금강의 수운을 통하여 외부와 연결되었다. 태성산 동쪽 나루터가 교통의 결정지점이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나루터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서 상류로는 부여에, 하류로는 강경에 이르렀다. 마을의 동남쪽 퇴인봉 아래 후포리도 금강에 있던 포구 취락이었다. 장정마을 주민들은 후포리의 포구에서 강경으로 가는 장삿배를 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장정마을의 교통 여건은 육상 교통이 아니더라도 금강을 통한 수상 교통이 일반적이어서 매우 편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육상 교통 중심의 교통망이 구축되면서 부여로의 접근성이 좋아졌고, 주로 이용하는 시장권도 강경에서 부여로 바뀌었다. 장정마을은 이제 점차 전국적인 시장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수박멜론이 특화되어 농협으로 통하여 출하되고 있다. 농산물 유통 이외에 오늘날 장정마을 주민들의 일상생활권은 육상 교통망의 접근성을 반영하여 주로 부여권에 속하고 있다.

장정마을에는 유교적 경관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무속신앙, 불교, 대종교 등과 관련된 다양한 종교 경관들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풍수지리적으로 태성산은 마을의 주산으로서 태사각이라는 사당이 봉우리에 있다. 1970년대까지 마을 주민들은 태사각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냈다.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첫번째 정일(丁日)에 지냈다. 마을 주민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도 참여하는 마을 공동체의 축제였다. 태사각에는 고려 개국 공신 유금필유금필의 본처를 목상(木像)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에 무당이 많아진 것은 6·25 전쟁 전후였다. 외지에서 유입된 무당도 많지만, 진주 강씨 출신도 있었다. 주민들이 매년 초 무당집을 찾아 운세를 점치는 것이 중요한 관행이 될 정도로 종교에 의지하는 면에 강하였다.

해방 직후 퇴인봉 기슭에 대종교의 사당인 천진전(天眞殿)이 세워졌다. 장정마을에서 대종교와 관련된 인물이 다수 배출되고, 주민의 상당 부분이 대종교의 신자라는 점이 주요하였다. 일제 강점기 대종교 지도자로 활동한 강석기장정마을 출신이고 강석기의 아들도 모두 대종교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불교 사찰과 개신교 교회당도 지어졌다. 장정마을에는 이처럼 무속신앙에서부터 대종교라는 민족종교, 기독교, 불교와 같은 근대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종교 경관이 거듭하여 나타났다. 그 결과 종교 경관이 마을에서 매우 우세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양한 종교 경관이 존재하는 만큼 전통적으로 종교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진주 강씨 종족마을의 형성]

장정마을진주 강씨들은 약 350여 년 전에 마을에 정착했다. 진주 강씨가 들어오기 전에 마을에는 다른 성씨들이 살고 있었다. 신창 맹씨, 한양 조씨, 거창 신씨 등이다. 그러나 진주 강씨가 들어오자 다른 성씨들은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 장정마을진주 강씨 마을이 되었다. 진주 강씨 족보에 따르면 장정마을에 입향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은 17세기 중엽 강치손이다. 강치손은 명종 때 사헌부집의로 추증된 강질의 손자이다. 강치손의 입향 동기는 병자호란을 피해 외가에 입향하였다고 전할 뿐 기록은 없다. 일설에 따르면 강치손의 손자 강맹종을 입향조로 보기도 한다. 진주 강씨 족보에는 강맹종이 신창 맹씨와 혼인한 것으로 확인된다. 신창 맹씨의 재산이 진주 강씨로 흡수된 이후 장정마을에 거주하는 진주 강씨는 모두 강맹종의 자손들인 것이다. 장정마을에서 진주 강씨가 실질적으로 생활권을 형성한 것도 강맹종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진주강씨장정마을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강치손의 20세와 21세손의 자손이 번성하면서 대거 진주 강씨가 세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후손들은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하기도 하였다. 은진, 석성, 대흥, 서천 등으로 옮겨간 자손들은 그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다. 장정마을은 전통적인 종족 마을이므로 자치와 질서가 종회와 가규(家規)에 의해 유지되었다. 효제(孝悌)의 의(義)의 돈목(敦睦)의 의(誼)가 두터워 서로 아끼고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종가에서 종회를 열어서 가규에 따라 벌을 시행하였다. 종회는 문중의 어른에 해당하는 문장(門長)을 비롯하여 여러 임원을 두고 금전의 출납과 재정 지출 문서를 담당하게 되었고 매년 12월 첫째주 일요일에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문중 소유의 토지에는 20여만 주의 나무를 심어 울창하게 자라 그 수입으로 돈화계(敦和契)를 조직하고, 진흥회의 기본 자금도 매년 증가하게 되었다. 1929년에는 뽕나무 5,000그루를 심어서 잠업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문중 소유 토지의 소작료 수입으로 조상의 제사 비용을 충당하고 나머지는 문중 인물 중에서 가난한 자들을 구휼하였다. 장정마을에서는 1925년부터 진흥회를 조직하여 마을 공동 사업을 진행하였다. 풍속 개량, 근검 저축, 산업, 토목, 위생, 교육 등과 같은 사무를 수렴하여 마을 주민의 공동 노력을 기울였다.

[근대 문화의 유입과 생활의 변화]

근대 문화의 상징처럼 간주된 것은 전기와 전화였다. 가로등이 서울의 밤하늘을 처음 밝힌 이후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근대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장정마을 사람들은 그로부터 70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 들기름에 심지를 박은 등잔이나 석유 등잔, 호야 램프를 사용한 장정마을 사람들은 1973년 한국전력의 부여국장이 부여군 출신임을 이용하여 민원 신청을 하였고, 덕분에 전봇대가 마을 도로에 하나둘씩 세워지면서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전기가 들어오자마자 장정마을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텔레비전과 냉장고 구입을 서두르게 되었고 마을 회관이나 주변이 확성기가 설치되어 안내 방송이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기나긴 밤을 함께 해 준 라디오는 6·25 전쟁 직후 동두천에서 처음 구입하였다고 한다. 서울이나 대전에 사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라디오로 편안히 방 안에 앉아 대중 가요와 라디오 연속극을 신속하게 접할 수 있었다. 깜깜한 밤에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던 장정마을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바깥 세계와 연결해 주는 정보 매체이자 오락 기구였다. 전기 다음으로 들어온 문명의 이기는 바로 전화였다. 1902년 처음 서울에 공중 시외전화가 설치된 이래 무려 70년이 지난 1971년 장암농협 지소에 처음 전화가 개설되었고 장정마을에는 1977년 당시 이장의 집에 행정 전화가 설치되었다. 그 덕분에 이장은 교환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입는 옷의 변화는 개항 이후 영국산 면제품이 조선 면포 시장을 잠식하고 1900년 이후 일본 오사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면직물이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도시 사람들은 일본산 면직물이나 중국산 비단으로 양복을 입고 다녔으나 가난한 농촌 사람들은 1960년대 초반까지 직접 길쌈을 하여 옷을 해 입고 다녔다. 장정마을 대부분의 주민들은 가내수공업으로 만들 무명, 모시, 명주 등 옷감을 시장에 판매하기도 하고 자가 소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의복의 생산은 여성들의 손을 거쳤다. 일제 강점기 논 2~3마지기를 팔아야 살 수 있었던 미싱을 가지고 있는 가구를 매우 드물었다. 1950년도에 이르면 재봉틀이 많이 보급되어 장정마을에도 50여 대가 있었다고 한다.

장정마을금강 변에 있어서 다른 마을과는 달리 여러 민물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서해안 군산에서 강경까지 밀물이 들어오는 까닭에 황복, 실뱀장어, 숭어, 잉어, 조개와 재첩을 잡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마을 사람들은 참게 등을 잡아 겨울철 식탁을 풍성하게 하곤 하였다. 장정마을에는 단무지용 무 시설 재배 지역으로 가을에는 무청이 많이 나온다. 주변 음식점에서 무청을 얻어 오기도 한다. 장정마을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은 돼지꼬치이다. 살기 어려웠을 때 잔치 음식으로 대꼬치 하나에 돼지고기 세 조각을 끼워 갖은 불고기 양념을 하여 숯불에 구워 내는 장정마을식 돼지고기 바비큐인 셈이다. 그러나 비닐하우스 농사가 보편화되면서 지금은 장정마을을 대표하는 음식은 영양탕으로 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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