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893
한자 姜錫箕
영어공식명칭 Kang Seokgi
이칭/별칭 강우(姜虞),강호석(姜湖石)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2년 6월 27일연표보기 - 강석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0년 8월 29일 - 강석기 경흥감리서주사서 판임관 6등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강석기 부여 장정마을에 천영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강석기 중국 화룡현 청파호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강석기 단군 천조에게 제향
활동 시기/일시 1915년 7월 - 강석기 「초홍호자동포문」, 「조만동포맹서」등 작성 및 배포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강석기 중국 연길현 관도구에 천영학교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강석기 3·1 운동에 연루되어 용정 일본영사관에 피체
활동 시기/일시 1922년 9월 - 강석기 대종교 대표로서 태평양회의에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 제출
몰년 시기/일시 1931년 2월 13일연표보기 - 강석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강석기 대통령 표창 수훈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강석기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출생지 장하리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천영학교 설립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강석기(姜錫箕)[1862~1931]의 다른 이름은 강우(姜虞), 강호석(姜湖石)이다. 아버지는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장정마을에서 세거한 진주 강씨 강신발이며, 아들은 강진구(姜鎭求)·강철구(姜鐵求)·강용구(姜鎔求)이다.

[활동 사항]

강석기는 1862년 6월 27일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에서 태어났다. 1900년 8월 29일 경흥감리서주사서 판임관 6등에 임명되어 러시아와 경계 지역에서 러시아에 대항하여 조선인의 권익을 지켰다. 1905년에는 일본에 있는 의친왕을 데려오기 위하여 사람을 파견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1906년 장정마을에 천영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노동야학 활동도 하였다. 집에 광일의숙을 만들어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강석기는 1913년 나철과 더불어 두만강을 건너 중국 화룡현 청파호로 망명하였다. 1914년 여름 백두산 최고봉에서 단군 천조에게 제향을 드리고 조국 회복을 기도하며 혈서를 써 결의하였다. 1915년 6월 나철을 대신하여 백두산 상봉을 봉심하고 혈서로 제천하였다. 7월에는 백두산 아래 내도산에서 수도·선교하면서 「초홍호자동포문」, 「조만동포맹서」 등의 경고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1917년 부여 장정마을에 설립한 천영학교와 같은 이름으로 중국 연길현 관도구에 천영학교를 세워 동포 교육에 힘썼다.

1919년 4월, 3·1 운동에 연루되어 용정 일본영사관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강제로 국내에 송환되어 회령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20년 5월 3일 남도본사에서 개최한 삼신전천제식을 집례원으로 주도하였고, 1921년 봄 도사 김교헌에 의하여 대종교사교위리에 위촉되어 3년간 시무하였다. 1922년 9월, 대종교 대표로서 사회단체 대표들과 연명으로 태평양회의에 우리 대표단 위원의 출석을 용인하여 주기를 청원하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제출하는 등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석기는 1931년 2월 13일 사망하였다. 장례는 1,000여 명의 조문객이 운집한 가운데 규암리에 있는 『동아일보』 지국에서 동지연합장으로 치렀다.

[묘소]

강석기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국립대전현충원의 독립유공자 3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강석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