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송 대사와 환의 고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166
한자 碧松大師-換衣-
이칭/별칭 「벽송 대사와 환의재」,「벽송 대사와 환희 고개」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시대 시대 미상
집필자 김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90년 - 「벽송 대사와 환의 고개」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주민 김판술[남, 80세]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벽송 대사와 환의 고개」 『전설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5년 - 「벽송 대사와 환의 고개」 『부안군지』2권-부안 사람들의 삶에 수록
관련 지명 환의재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원암지도보기
채록지 옹중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지도보기
성격 설화|명당 발복담|효행담|지명 유래담
주요 등장 인물 벽송 대사|벽송 대사 어머니
모티프 유형 풍수지리|효행|지명 유래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원암 지역에서 환의 고개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벽송 대사와 환의 고개」는 이복 누님을 위하여 명당자리를 잡아주어 도강 김씨 집안이 부유하게 되었다는 명당 발복담이자, 벽송 대사가 어머니를 만나는데 어머니가 지으신 새 옷으로 바꾸어 입었기 때문에 이 고개를 ‘환의(換衣) 고개’, 또는 어머니와 아들이 기쁘게 만났기 때문에 ‘환희(歡喜) 고개’로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담이다. 이를 「벽송 대사와 환의재」, 「벽송 대사와 환희 고개」 등이라고도 한다.

[채록/수집 상황]

1990년 전라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의 523~524쪽에 「벽송 대사와 환의 고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주민 김판술[남, 80세]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2015년 부안군 부안문화원에서 편찬한 『부안군지』 2권-부안 사람들의 삶의 677~678쪽에도 재수록되어 있다.

[내용]

벽송 대사는 조선 중엽, 정읍 태인에서 출생했다. 지응 대사라고도 하며 속세에서의 성은 송씨이다. 벽송 대사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어서 자식이 없는 것을 허전해 하다가 여산 송씨 집안으로 개가하여 벽송 대사를 낳았다. 서얼 출신으로 태어난 벽송 대사는 총명하였지만 차별과 구박을 받았다. 벽송 대사는 어머니 곁을 떠나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하고 태인 근처의 용문암이라는 암자에서 수도를 하며 풍수지리를 공부했다. 어느 날 도강 김씨 집안으로 시집간, 태인 고현 내에 살고 있는 이복 누님을 찾아갔는데 누님이 부자가 될 수 있는 명당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벽송 대사는 서얼인 자신을 차별한 적이 없는 누님이 고마워서 명당자리를 잡아주었고 도강 김씨 집안은 부유하게 되었다.

그 후 벽송 대사는 부안의 변산으로 와 내소사와 청련암의 중간에 벽송암을 짓고 수도를 계속했다. 벽송 대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행방을 찾다가 아들이 부안 변산에 있음을 알고 아들을 찾아와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지만 벽송 대사는 계속 수도 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수도승의 거처에는 부녀자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벽송 대사와 어머니는 벽송암에서 십 리 넘게 떨어진 고개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만나기로 했다. 만나는 날 어머니가 새로 지어온 옷과 헌 옷을 바꾸기로 했기 때문에 이 고개를 ‘환의 고개[환의(換衣)재, 환의치(換衣峙)]’, 어머니와 아들이 기쁘게 만났기 때문에 ‘환희 고개[환희(歡喜)재, 환희치(歡喜峙)]’라고 부르게 되었다. 벽송 대사는 하나뿐인 아들의 출가로 후손이 끊길 것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벽송 대사는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에 모셔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지금의 동진면 본덕리 산에 모셨는데, 이 지방 사람들이 이곳에 치성을 드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무덤 위에 난 풀이 학질에 효험이 있다는 말이 있어서 무덤의 벌초도 저절로 되었다.

[모티프 분석]

「벽송 대사와 환의 고개」의 주요 모티프는 ‘풍수지리’, ‘효행’, ‘지명 유래’ 등이다. 당시 사회의 서얼 차별 문제가 이야기 속에 반영되어 있고, 이복 누님에게 명당을 잡아준 이유가 서얼인 자신을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데에서 당시 서얼 차별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어머니의 무덤을 명당에 모셔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다는 효행 모티프도 드러나 있다. 누님의 집터와 어머니의 무덤 자리를 좋은 위치에 잡아서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전국에 명당 발복 설화의 전형적인 내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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