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611
한자 崔命龍
영어공식명칭 Choe Myeongryong
이칭/별칭 여윤(汝允),석계(石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만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7년연표보기 - 최명룡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21년연표보기 - 최명룡 사망
출생지 최명룡 출생지 - 전라북도 전주시
수학|강학지 등운사(登雲寺)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옹정서원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인봉서원 - 전라북도 전주시 남노송동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 관직|경력 증대사헌

[정의]

부안군에 있는 옹정서원에 배향하고 있는 조선 후기 학자.

[가계]

최명룡(崔命龍)[1567~1620]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여윤(汝允), 호는 석계(石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이며, 할아버지는 사성(司成) 최순성(崔順成)이고, 아버지는 단성현감(丹城縣監) 최위(崔渭)이다. 아들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녹훈된 최경(崔勁)이다.

[활동 사항]

최명룡은 1567년(명종 22)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매일매일 옛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었다. 1578년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상장(喪葬)과 관련한 모든 일을 다 큰 어른처럼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 상을 마친 후 최명룡은 우죽(友竹) 이정기(李廷麒)를 찾아서 그의 문인이 되었다. 이정기는 최명룡의 총명함에 감복하여 그를 지극히 아끼며 “오늘도 명룡은 나를 가르치러 왔다”라고 하였다 한다. 1586년 어머니 상을 당한 후로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부안 변산(邊山)에 있는 등운사(登雲寺)[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있던 절]로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사서(四書)와 염락제가(濂洛諸家)[염계 사람 주돈이, 낙양 사람 정호와 정이를 비롯한 송나라 성리학자들을 가리킴]의 책을 섭렵하였다. 또한 음양(陰陽), 역학(易學), 천문(天文), 지리, 방기(方技), 도교, 불교, 산학(算學) 등 다방면에 걸쳐 공부하였으며, 양명학(陽明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바로 절에서 내려와 의주로 떠나는 선조를 호위하기 위해 상경하였는데, 도중에 경기도 파주(坡州)에 이르러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을 찾았다. 성혼은 최명룡과 대화를 나눈 뒤 “마침내 우리의 도가 의지할 곳이 생겼다”라며 감탄하였다. 그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이 전라도 금마현감(金馬縣監)[금마는 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을 말함]으로 부임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니, 김장생은 최명룡과의 만남을 매우 기뻐하였다. 이후 김장생과 최명룡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으며, 최명룡은 김장생의 글이라면 모두 섭렵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최명룡의 박식함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최명룡은 1620년(광해군 12)에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명룡의 소식을 들은 김장생은 몹시 슬퍼하며 공자가 안자(顔子)를 잃었을 때의 슬픔에 견주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영전에 올렸으며, 나중에는 묘갈명(墓碣銘)까지 지어 주었다. 한편 최명룡은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로 그림에도 소질이 뛰어났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선인무악도(仙人舞樂圖)」가 그의 작품이며, 최명룡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선객도(仙客圖)」도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호위한 공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에 있던 옹정서원과 전라북도 전주시 남노송동에 있던 인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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