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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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晴湖里濟州高氏所藏古文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류호석 |
소장처 | 청호리 제주 고씨 소장 고문서 -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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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문서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제주 고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서.
[개설]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부안에 처음 들어온 것은 16세기 초의 일로, 고세호(高世豪)가 처가를 따라서 옥구에서 부안으로 이거하면서부터이다. 고세호의 가문이 크게 번창한 것은 그 손자인 고희(高曦) 때이다. 고희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바로 이것이 제주 고씨 문중을 빛낸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특히 이때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과 백련리 일대의 땅을 사패지지(賜牌之地)로 하사받았는데, 이것이 제주 고씨 집안의 주요한 경제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부안의 세족으로 뿌리를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제주 고씨 문중에서는 무과 급제자 14명, 문과 급제자 1명, 봉군(封君)된 자 1명, 공신으로 녹훈된 자 5명이 배출되어 부안의 명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청호리 제주 고씨 소장 고문서(晴湖里濟州高氏所藏古文書)를 통해서 이처럼 한 가문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구성/내용]
1982년 11월 9일에 보물 제739호로 지정된 부안 제주 고씨 문중의 고희 초상 및 문중 유물(高曦肖像-門中遺物)은 총 20종 215점이다. 이 중에서 고문서와 성책 문서는 교지(敎旨) 53점, 치제문(致祭文) 1점, 공신녹권(功臣錄卷) 1책, 회맹록(會盟錄) 3책, 방목(榜目) 1책, 충훈부(忠勳府) 완문(完文) 1점, 하체(下帖)[고을의 수령이 면임, 동임, 향교 등에 내리는 지시문] 2점, 천장문(薦狀文) 1점, 호적 문서 42점, 소지(所志) 43점, 입안(立案) 6점, 서목(書目) 1점, 분재문기(分財文記) 8점, 회문(回文) 1점, 명문(明文) 13점, 수표(手標) 3점 등 182점에 이른다.
호남권한국학자료센터에서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에 대한 탈초(脫草)[흘려 쓴 글씨를 읽기 쉽게 바꿈]와 해제(解題) 작업을 한 뒤 이를 고문서 DB로 구축하여 온라인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내용들을 토대로 하여 주요 문서들의 내용을 옮겨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세호(高世豪) 무과(武科) 홍패(紅牌) : 1526년(중종 21) 10월 고세호가 무과에 급제하여 받은 홍패이다. 홍패의 내용으로 보아 고세호는 무과에 급제하기 전에 이미 음직(蔭職)으로 현직 무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1604년 고사렴(高士濂) 추증 교지(追贈敎旨) : 1604년(선조 37) 12월 26일에 고희의 아버지 고사렴(高士濂)에게 병조 참판의 증직을 내리면서 발급한 교지이다.
3. 1605년 고홍달(高弘達) 백패(白牌) : 1605년(선조 38) 고홍달이 31세의 나이로 생원시 3등 제29인으로 합격하면서 발급받은 합격 증서이다.
4. 1672년 고홍건(高弘建) 처 유씨(兪氏) 준호구(准戶口) : 1672년(숙종 13)에 고홍건의 처 유씨가 부안군으로부터 발급받은 준호구이다. 이 때 유씨는 지금의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63세 되는 유씨 부인이 혼자 살았다. 고홍건은 1651년(효종 2)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1655년(효종 6)에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고홍건이 첫째 부인인 함양 박씨(咸陽朴氏)와 사별한 뒤에 다시 재혼한 여자였는데 나이 차이가 30년이나 있었다. 이 때에 유씨 부인은 30명이 넘는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5. 1591년 고사렴(高士濂) 별급 문서(別給文書) : 1591년(선조 24) 4월 11일에 고사렴이 손자 고홍건에게 논과 노(奴)를 주면서 작성한 분재기(分財記)이다.
6. 1640년 고홍건 화회 문기(和會文記) : 1640년(인조 18) 9월 1일에 고홍건과 고희의 두 딸이 한자리에 모여서 부모의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한 화회 문서이다. 이 문서는 고희가 사망하고 또 그 부인인 부령 김씨도 사망한 뒤에 고희의 계자(系子)인 고홍건이 누이들과 한 자리에 모여 재산을 나누면서 작성한 것이다.
7. 1737년 노(奴) 이선(二先) 패지(牌旨) : 1737년에 상전 이씨(李氏)가 노 이선에게 부안현 하서면 백련동[현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에 있는 자기 소유의 논밭을 팔라고 하면서 써 준 위임장이다.
8. 1809년 유학(幼學) 유광석(柳光錫) 상서(上書) : 1809년 12월에 부안의 유학 유광석 등 16명이 연명으로 작성하여 부안현감에게 올린 상서이다. 영성군(瀛城君) 고희의 7세손인 고영기(高永基)의 부인 부령 김씨의 절행(節行)을 기려 정려를 내려 달라는 내용이다.
9. 1648년 예조 입안(禮曹立案) : 1648년(인조 26)에 예조에서 제주 고씨 집안에 양자(養子)를 들인 것을 승인하면서 발급한 입안이다. 영원군(瀛原君) 고홍건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9촌질(九寸姪) 고두황(高斗煌)을 양자로 삼기 위하여 관련 문서를 첨부하여 예조에 제출하자 이를 승인한 것이다.
10. 1604년 호성공신녹권(扈聖功臣錄券) : 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이 지난 1604년 10월에 고희 등 86명을 호성공신에 녹훈하면서 발급한 녹권이다. 1등 2명, 2등 31명, 3등 53명 등 모두 86명이 공신으로 녹훈되었는데, 고희는 3등에 녹훈되었다.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義州)까지 호종한 공으로 이항복(李恒福) 등이 책훈된 훈호(勳號)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에 부안의 주요 세족 중 하나인 제주 고씨 가문의 성장과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1차 사료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조선 시대 향촌 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