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78 |
---|---|
한자 | 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Samil Undong|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기미 만세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줄포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 3·1 운동 시작 |
---|---|
발생|시작 장소 | 3·1 운동 발생 장소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줄포면 |
성격 | 항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천도교 단체|기독교 단체|은희송 |
[정의]
1919년 3월 30일과 4월 18일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과 줄포면에서 일어난 부안 지역의 3·1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3·1 운동 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호응하여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서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경과]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3·1 만세 운동은 지역 천도교인들이 이웃한 정읍 등의 천도교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계획되었다. 3월 중순 무렵부터 기독교 단체 및 일반 청년층과도 은밀히 접촉하여 조직의 대강을 취하고, 25일부터 본격적인 실천 단계에 들어갔다. 당시 참여자 중에는 일본 경찰 순사보(巡査補)로 재직하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출신의 은희송(殷熙松)도 있었다. 은희송은 3·1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후 직접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병을 핑계로 순사보직을 그만 두고 전라북도 부안과 주변 지역에서 동지를 규합하며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26일경에는 천도교 단체와 기독교 단체가 연합하여 부안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양측 교인들이 전도를 가장하여 각 면과 마을을 순방하며 시위 동참을 권유하였다.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도 준비하여 각 지역에 배부했으나, 일본 관헌에게 정보 일부가 탐지되었다. 경계망이 삼엄해지면서 낮에는 도저히 집단행동을 취할 수가 없게 되자, 야음을 이용해 밤 8시에 거사하기로 정하였다. 3월 30일 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뒷산에서 올린 봉화를 신호탄으로 독립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여러 산에서 잇달아 올린 봉화와 함께, 횃불과 등불을 든 만세 행렬이 퍼져 나갔다.
4월 초순에는 줄포의 공립 보통학교 3학년~4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 교정에서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당시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김태순(金泰順)·박기봉(朴基鳳)·김동섭(金東燮) 등은 4월 18일 줄포 장날에도 만세 운동을 벌이려고 하였다. 4월 18일 아침 보안면사무소 게시판, 큰길가 소나무에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매달았다가 11시 무렵 수업이 끝난 후 시장에 모여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관헌의 삼엄함 경계와 진압책에 밀려 본격적인 행진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태극기를 돌리며 만세를 부르는 정도에서 그쳤다.
[결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의 시위를 주도한 송산성, 임창무 등이 법정에서 1년의 실형 선고를 받았고, 줄포의 시위를 주도한 김태순, 김동섭, 서용순(徐龍順), 이병근(李秉根), 박병섭(朴炳燮), 이병갑(李炳甲) 등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3·1 운동은 천도교·기독교계의 청년·학생은 물론 일본 경찰의 순사보 재직자까지 적극 가담하여, 일제의 무력 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