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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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丑山浦營 |
영어공식명칭 | Chuksanpo-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237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건립 시기/일시 | 1384년 - 축산포영 축산성을 축성하여 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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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592년 - 축산포영 동래 부산포로 이전 |
폐지 시기/일시 | 1895년 - 축산포진 재폐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67년 - 축산포진 재설치 |
소재지 | 축산포영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237 |
성격 | 수군진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 설치되었던 조선 전기 수군만호진.
[개설]
조선에서는 관방요해처(官房要害處) 중에 대형 전함이 정박하기 쉽고, 태풍이나 폭풍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는 지역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만반의 대비를 하였다. 영해부는 이러한 여건을 갖춘 축산포(丑山浦)에 수군만호진을 설치하고 대규모의 수군을 주둔시켜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아내는 중요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전통시대 영덕·영해 지역은 지리적 조건에 의해 외적, 특히 왜구의 침입을 경계하는 중요한 관방요충지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에 대형 전함이 정박하기 쉽고 태풍 등의 자연재해에 보호될 수 있는 지역에 수군만호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영해부에는 축산포·대진포·별정포·차여포·병곡포·망곡포·관어대포 등의 관방요해처가 있었다.
[관련기록]
축산포영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의 관방(關防) 및 관액(關阨)조에 관련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영해부에는 축산포·대진포·별정포·차여포·병곡포·망곡포·관어대포 등의 관방요해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축산포에 수군진영(水軍鎭營)을 두고, 수구만호(水軍萬戶) 1인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의 경상도 지역 군선(軍船)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병선이 285척이 배치되었다고 하며, 뒤의 『경국대전(經國大典)』 병조에 의하면 경상도에는 대맹선(大猛船) 20척과 중맹선(中猛船) 66척, 그리고 소맹선(小猛船) 105척, 무군(無軍) 소맹선 75척을 수군의 각 진과 포에 배치하였다.
축산포영에 설치된 수군만호진의 규모를 살펴보면, 1425년(세종 7)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는 병선 12척, 수군 429명이며, 1469년(예종 1)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병선 6척, 소기(所騎) 군인 360명, 무군병선(無軍兵船) 4척이 있었다고 한다. 축산포영에 배치된 병선은 주로 소맹선이었다. 소맹선은 30명의 수군이 승선하여 운영되는 전함으로 규모가 작은 병선이며, 무군병선이란 유사시를 대비하여 포구 내에 그대로 정박시켜 둔 예비선이다.
축산포영의 수군은 창포 이북에서 후포 이남에 이르는 해안과 바다의 전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왜적을 방비하며 연안 방어에 임하였다. 이들은 축산포영의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관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 부산포로 역할을 이전하였으나, 18세기 중반의 『속대전』에 나타난 축산포진의 병선 배치는 전선(戰船) 1척, 병선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변천]
축산포영은 1384년(고려 우왕 10)에 축성한 축산성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부산포로 진을 옮겨서 폐지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되는 1592년(선조 25)에 동래부의 부산포에 그 역할을 이전한 후 폐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에 의하면 병전(兵典) 제도병선조(諸道兵船條)에 경상좌우도의 주진(主鎭)을 포함하여 52개의 포진(浦鎭)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 축산포진이 기록되어 있다. 『속대전』에 나타난 축산포진의 병선 배치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이는 전기의 병선보다 크게 축소된 규모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특별한 왜적의 침입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수군의 규모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기의 축산포에 편제된 수군의 형태는 대형 주력함인 전선에다 소형 전투함인 병선을 배치하여 전선을 보호하는 한편, 척후선인 사후선을 배치한 형태의 편제로 적용되고 있지만, 결국은 후기에 들어와서 경상도 동부 해안방어를 위하여 설치되었던 오포와 축산포 만호진이 모두 폐지되어 영덕 일대에 설치되어 있던 수군의 진관은 모두 폐지되었다.
그런 가운데 대원군은 지방 군제를 우선 개편하여 서구 열강의 일차적 침입지인 연해(沿海)를 방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 이때 임진왜란 이후에 폐지되었던 축산포진을 1867년(고종 4) 7월에 다시 설치하여 동해안 일대 연안 방어의 책임을 맡겼다. 지방군제도 1895년(고종 32) 7월 15일[윤달]의 칙령 제139·140·141·142호에 의하여 3도 통제영·각도 병수영·진영(鎭營)·진보(鎭堡)가 모두 폐지되면서 지방군제는 완전히 폐지되고, 새로운 진위부대로 대체되었다. 이때 영해의 축산포진도 다시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축산포영의 존재는 영덕 지역이 외적, 특히 왜구의 침입을 경계하는 중요한 관방요충지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