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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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普天敎反對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허종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보천교(普天敎)는 차경석(車京石)[1880~1936]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종교였다. 1911년 차경석은 고판례(高判禮)[1880~1935]와 함께 선도교(仙道敎)를 세울 때 중심 역할을 하였다.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한 후 자신이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가 되고, 조선은 세계 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21년 차경석은 경상남도 함양군의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제(天祭)를 지내고 보천교를 선포하였다.
보천교가 『시대일보』를 인수하고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는 등 교세가 커지자 일제는 탄압과 동시에 회유하였다. 차경석은 종교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에 친일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친일 단체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의 채기두(蔡基斗)·고희준(高羲駿) 등과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일선융화(日鮮融和)를 주장하며 전국을 순회하면서 친일 강연을 열었다. 사회운동 세력은 보천교의 친일 활동과 함께 신비적인 요소가 많아 미신 타파의 취지에서 보천교를 배척하는 활동을 전국에서 벌였다.
[경과]
1926년 1월 영덕청년연맹은 보천교가 지역민을 현혹하고 현실 인식을 마비시킨다고 규정하고, 미신과 봉건의식 타파의 일환으로 보천교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강연단을 조직하여 크게 경상북도 영덕 지역과 영해 지역으로 나누어 강연 계획을 세웠다. 영덕 지역은 이봉술(李鳳述)과 이태범(李泰範)이 담당했으며, 영해 지역은 이기석(李基錫)과 김우영(金宇英)이 담당하였다. 또한, 지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높이기 위해 미신 타파와 보천교 박멸 표어를 모집하였다. 강연단은 ‘박멸하자 미신, 근절하자 미신, 더욱이 보천교’의 내용이 담긴 선전지를 들고 보천교반대운동을 벌였다. 지역민들도 보천교반대운동에 호응하여 많은 표어를 만들어 영덕청년연맹에 전달하였다.
[결과]
보천교반대운동은 보천교를 비호하던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활동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일제 경찰은 보천교가 미신의 성격을 지녔지만, 단체이기 때문에 두 단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핑계를 내세워 선전지에 담긴 보천교 관련 내용의 삭제를 강요하고 선전지를 압수하였다. 동시에 강연회도 금지하여 활동이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의의와 평가]
보천교반대운동은 영덕 지역 사람들에게 친일 단체를 폭로하고 근대 지식과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