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51 |
---|---|
한자 | 南亭面三一獨立運動 |
이칭/별칭 | 남정면독립만세운동,남정면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남정면 3.1독립운동 시작 |
---|---|
종결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남정면 3.1독립운동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장사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
성격 |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박명방|김석조|정상용|김도석 |
[정의]
1919년 4월 4일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29명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2시 20분경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로써 전국적인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3월 16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금호동(錦湖洞)의 개신교 북장로파 조사(助師) 강우근(姜佑根)은 3.1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남정면 남정동 김용하(金龍河)의 집을 방문해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강우근의 만세운동 참여 권유에 김용하는 3월 18일 같은 마을 이복이(李卜伊)를 설득하였다. 3월 16일 영덕 읍내 남석동 시장에서는 강우근 등의 주도로 영덕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남정동 주민이었던 최명술(崔命述)·신조경(申朝庚)·강두황(姜斗煌) 등도 영덕면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렇게 해서 영덕 군내 전역으로 3.1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부흥동(富興洞)의 박명방(朴命方)과 양성동(洋城洞)의 개신교 신자 김석조(金石祚), 장사동의 정상용(鄭尙鎔) 등 20대 청년들은 『매일신보』의 보도를 보고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4월 3일 부경동(阜境洞) 김도석(金道石) 집에서 여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우리들도 구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니 마땅히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결의하였다. 청년들은 각자 구 한국 국기를 모방한 작은 종이 깃발을 만들었다. 하지만 김도석의 부친에게 발각되어 만들었던 깃발은 전부 소각 당하였다.
[경과]
4월 4일 박명방이 정상용 집으로 찾아 가서 “오늘은 장사동 장날이다.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일으키자”고 협의하였다. 김석도도 동의하여 재차 작은 종이 깃발 11기를 만들었다. 당시 깃발에는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신대한독립만세(新大韓獨立萬歲)’라는 글을 적었다. 정오 무렵 이들은 장사동 시장으로 나아가 박춘길(朴春吉) 등에게 종이 깃발을 배부하였다. 이어 깃발을 흔들며 시장 군중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시장에 있던 100명의 군중도 이에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결과]
남정면 3.1독립운동을 주도한 박명방·김석조·정상용은 장사경찰관주재소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3명 모두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남정면 3.1독립운동은 경상북도 영덕 군내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 3.1운동으로, 개신교 신자와 청년들이 주도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