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면 3.1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47
한자 丑山面三一獨立運動
이칭/별칭 축산면 만세시위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연표보기 - 축산면 3.1독립운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연표보기 - 축산면 3.1독립운동 종결
발생|시작 장소 상원동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상원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정규하|박의락|남세혁|박원종|이동화|김실광|황선의|박동활|최태봉|박익찬|박용달|정점용|이주득|윤봉산|김도학|이원이

[정의]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29명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2시 30분경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1운동에 대한 소식은 영덕으로 전해졌고,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영덕 지역의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성내동 시장에는 군내 5개 면의 20여 개 마을 주민 약 2,000명이 운집해 있었다.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군중은 영해경찰관주재소,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공립소학교, 영해우편소, 영해면사무소 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축산면 인사들도 가담하였다.

[경과]

3월 18일 오후 3시 반경 보고를 받고 영덕경찰서 서장, 경찰 3명, 순사보 1명이 영해에 도착하였다. 영덕 경찰서 경찰들은 군중을 진압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거센 저항을 받고 주재소로 피신하였다. 결국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경찰들은 두 차례에 걸쳐 영덕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경찰들이 도주하자 김실광(金實光)·황선의(黃善儀)·박동활(朴東活) 등 40~50명의 군중이 경찰들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주재소 동남쪽 약 400m 지점에서 경찰들이 군중의 추적을 저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무기를 빼앗겨 버리고 각자 흩어진 채 탈주하였다. 이 가운데 경찰 1명과 순사보 1명은 영덕까지 도망쳤으나, 서장과 경찰 1명은 축산면 상원동의 최수경(崔壽敬) 집 부근에서 군중에게 붙잡혔고 나머지 경찰 1명도 혼자서 피신하다가 군중에게 잡혔다.

당시 상원동의 남갑환(南甲煥) 집에서 제사가 거행되어 인근 마을 인사들이 집합해 있었다. 이때 최태봉(崔泰奉)이 그곳으로 가서 “지금 영덕경찰서장 일행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다. 힘을 보태어 달라.”라고 요청하자, 박익찬(朴益燦)·박용달(朴龍達)·정점용(鄭占用)·이주득(李周得)·윤봉산(尹奉山)·김도학(金道學)·이원이(李元伊) 등이 동참하였다. 그렇게 모인 약 100명의 군중에 의해 서장과 경찰 2명이 체포되었다. 군중은 경찰들을 붙잡아 포박하고 구타하였으며, 칼을 빼앗고 제복과 제모들을 파손시켰다. 인사불성이 된 경찰들을 군중들에 의해 영해로 끌려갔고, 이후 여관에 감금되었다.

[결과]

3월 19일부터 일제 경찰들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축산면 3.1독립운동과 관련된 인사들도 체포되었고,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경주지청으로 송치되었다. 축산면 3.1운동 관련 인사들은 4월 14일부터 4월 22일까지 3회에 걸쳐 대구검사국으로 재송치되었으며, 이 가운데 9명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된 17명은 7월 11일 재판을 받았는데, 소요죄·상해죄 등으로 1명이 징역 1년 6월, 4명이 징역 1년, 3명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7명이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으며, 2명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실형을 선고받은 5명은 곧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 취소에도 불구하고 형량은 종전과 동일하게 선고되었다.

[의의와 평가]

축산면 3.1독립운동영해면 3.1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일반 군중이 합세한 사건이다. 당시 영덕 주민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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