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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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盈德面三一獨立運動 |
이칭/별칭 | 영덕면만세운동,영덕면독립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덕면 3.1독립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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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덕면 3.1독립운동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남석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남석리 |
성격 | 독립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김세영|김혁동|강우근|이승구|박윤규|김용규|김암우|강대열 |
[정의]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29명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2시 30분경 파고다공원에서 군중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3.1운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919년 3월 10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독립만세운동을 인지한 경상북도 영덕의 강우근(姜佑根)은 영해의 김세영(金世榮)이 보낸 김혁동(金赫東)에게 만세운동에 참가를 권유받았다. 강우근은 북장로파 조사로 영덕 읍내를 비롯해 3개 교회의 감독 임무를 맡고 있었으며, 3월 16일부터 3월 18일까지 영덕 읍내 교회와 신자들의 집을 방문해 동참을 권유하였다. 또한 강우근에게 동조한 인사들이 재차 동지를 규합하면서 영덕면에서는 금호동(錦湖洞)·오포동(烏浦洞)·화수동(華水洞), 그리고 남정면 남정동(南亭洞) 등지의 신자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3월 16일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葡山洞)에서는 이승구(李承玖)가 박윤규(朴潤奎)에게 동참을 권유하였다. 3월 17일에도 포산동과 교회를 비롯해 영덕군 지품면의 원전동(院前洞)·낙평동(洛坪洞) 등의 신자들에게 동참을 권유하였다.
[경과]
경상북도 영덕면 3.1독립운동은 3월 18일 영덕 읍내 남석동 시장에서 일으키기로 사전에 약속되었다. 이때 축산면 화천동(華川洞) 김용규(金溶奎)가 같은 날 영해면 성내동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가하려고 가다가 남석동 시장에 들리게 되었다. 또한 남정동의 최명술(崔命述)·신조경(申朝庚)·강두황(姜斗煌), 상직동(上直洞)의 윤석규(尹錫奎)·김태성(金泰成), 금호동의 주병책(朱秉策) 등이 남석동 시장에서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후 2시경 강우근·이승구·김암우(金岩佑) 등의 주도로 영덕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남석동 시장에 있던 군중이 호응해 독립만세를 외쳐 만세 군중은 1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영덕경찰서 경찰들이 즉각 시장으로 출동해 군중을 제지하고 주도 인사 20여 명을 체포하고 탄압하여 군중들은 해산했다. 이후 개신교 신자들의 권유를 받은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이 주축을 이룬 군중 약 700명이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경찰서로 향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를 탐지한 경찰들이 재향군인과 소방조 등 20여 명을 소집하고 강구항에 입항한 일본인 어부 60여 명까지 동원해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군중은 구금 인사들을 구출하지 못했다.
[결과]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로 3.1독립운동 인사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1919년 5월 2일 영덕면 3.1독립운동 관련 인사 25명이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결과 징역 2년 1명, 징역 1년 6월 1명, 징역 1년 2월 1명, 징역 10월 3명, 징역 8월 6명, 징역 6월 4명, 태 90대 9명으로 각각 선고되었다. 주동 인사 강우근·이승구·강대열3명은 공소를 제기하여,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덕면 3.1독립운동은 영덕군·영양군의 개신교 북장로파 등 교파 교직자와 신자들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이고 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이 구금자들의 석방 요구를 시도한 독립운동이었으며 일제가 독립운동의 진압을 위해 재향군인, 소방조, 어부 등 민간인을 동원한 대표적 사례의 독립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