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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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曉峰 |
영어공식명칭 | Hyo Bong |
영어음역 | Hyo Bong |
영어공식명칭 | Hyo Bong |
이칭/별칭 | 운봉(雲峰),포운(泡雲),선옹(船翁),원명(元明),학눌(學訥),이찬형(李燦亨)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종수 |
[정의]
일제강점기 순천 송광사를 재건하고 해방 후 가야총림 방장과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던 승려.
[활동 사항]
효봉(曉峰)[1888~1966]은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 이병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속의 이름은 이찬형(李燦亨)이다. 법호는 효봉 외에 포운(泡雲)과 선옹(船翁)이 있고 법명은 원명(元明), 학눌(學訥)이다.
효봉은 12세 때인 1899년에 사서삼경을 모두 통달하였고, 14세 때인 1901년 평양감영에서 평양감사 주최로 열리는 백일장에서 장원하였다.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소학교를 거치지 않고도 평양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고, 22세 때인 1909년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26세 되던 1913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성에서 치른 법관시험에 응시하여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합격하였다.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및 평양의 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서 근무하였다. 1914년부터 1923년 사이 복심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할 때 일제는 반일감정을 완화하기 위해 사상범과 같은 중대한 재판은 효봉에게 맡겨 재판하도록 하였다. 1923년 독립운동가의 재판을 맡게 되어 사형을 선고하였는데 “신이 아닌 내가 어떻게 인간을 심판하고 벌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와 3년간 엿장수 행세를 하며 방랑 생활을 하였다.
효봉은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石頭) 보택(寶澤)[1882~1954]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통도사 내원암(內院庵)의 용성화상(龍城和尙), 수월화상(水月和尙) 등을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1931년 금강산 법기암 토굴에서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수행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선원,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덕숭산 수덕사 등에서 안거를 마쳤다. 오대산 상원사에서는 승려 한암(漢岩)[1876~1951]에게 ‘포운(泡雲)’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수덕사에서는 승려 만공(滿空)[1871~1946]에게 ‘선옹(船翁)’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받았다.
효봉은 1937년 다시 남쪽으로 향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렀다. 당시 순천 송광사는 100여 명의 승려가 머물고 있었지만 가난하여 겨우 불을 지피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새벽 좌선 삼매에 들었는데 고려 말 고봉화상(高峰和尙)[1350~1428]이 나타나 ‘효봉(曉峰)’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게송을 전하면서 도량을 더욱 빛나게 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에 승적을 금강산 신계사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옮기고, 삼일암(三日庵)에 머물며 제2의 정혜결사운동을 발원하고 사찰재건과 후학 지도에 온 힘을 쏟았다.
효봉은 1946년 해인사 가야총림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해방 후 가야산 해인사에 한국 불교 교단의 정립과 승려 양성의 목적으로 출가승들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을 설립하면서 효봉을 방장으로 추대한 것이다. 가야총림에서 주석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5년 만에 총림은 해산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온천동 금정사로 피난하여 안거를 마쳤고, 이때 구산(九山)[1909~1983]에게 전법게를 내렸다. 이후 통영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과 미래사에서 계속 수행하였다.
효봉은 1954년 8월 종단 정화 준비위원으로 상경하여 1955년 9월까지 정화불사운동으로 서울 선학원에 주석하였으나 일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자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오후 불식하며 정진하였다. 1956년 새로 구성된 종단에서 종회의장이 되었으나, 2년 뒤 종정인 승려 석우의 입적으로 비구 측 종정으로 추대되고, 서울 흥국사,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주석하였다. 종정에 취임한 지 6년 뒤인 1962년에 비구와 대처승을 통합하는 통합종단을 구성하고 초대 종정으로 다시 추대되었다. 당시 서울에 가지 않고 통영 미래사의 토굴과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3년간 머물고, 다시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옮겨 주석하였다.
효봉은 1966년 10월 제자들을 모아놓고 임종게를 읊고 입적하였다. 세납 79세, 법랍 4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