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치동 금치마을 당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82
한자 松峙洞今峙-堂山祭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치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45년 8월연표보기 - 송치동 금치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홰나무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치동금치마을 입구지도보기
성격 마을 신앙|동제
의례 시기/일시 정월대보름
신당/신체 홰나무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치동에 있었던 금치마을에서 지냈던 마을 제사.

[개설]

송치동 금치마을 당산제금치마을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모셨다고 전해지는 마을 제사이다. 금치마을은 조선 중기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터를 잡고 살다가 떠난 뒤 한때 폐촌이 되었다. 그 뒤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선귀가 토지가 비옥하고 산세가 좋다고 하여 황산에서 분가하여 금치마을에 옮겨와 살게 되었다. 분가할 당시 황산에 있는 당산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전해진다.

금치마을은 와동(臥洞)과 황정지 두 마을을 합쳐 금치라고 부르는데, 봉황이 누운 자태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와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지금도 봉고개라는 고갯마루가 있다. 또한 왜인이 살았다고 하여 왜동(倭洞) 또는 왜꼴이라고도 한다. 황정지는 황정자(黃亭子)에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사람들의 주생업은 농업이다.

[연원 및 변천]

금치마을 앞에는 해나무[홰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거목 3그루가 있었다. 송치동 금치마을 당산제는 홰나무에 모셨으나 8.15광복 이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금치마을 입구에 있는 홰나무에서 당산제를 모셨다.

[부대 행사]

송치동 금치마을 당산제를 지냈던 당시에는 농악도 성행하여 제(祭)를 올릴 때에는 농악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황]

8.15광복 이후 중단된 뒤 오늘날에도 제를 올리지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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