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203
한자 李容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9년 10월 6일연표보기 - 이용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6월 - 이용규 을사의병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07년 2월 - 이용규 교수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07년 5월 - 이용규 유배형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09년 8월 - 이용규 의병 모집 중 피체
활동 시기/일시 1912년 4월 - 이용규 의병 모집 중 피체
활동 시기/일시 1912년 8월 - 이용규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17년 4월 - 이용규 투옥 후 유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용규 조선 가정부조직 충남 대표 재직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이용규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이용규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6년 - 을사의병 거병
출생지 이용규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활동지 이용규 활동지 - 충청남도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조선가정부 조직(朝鮮假政府組織) 충남 대표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의병.

[개설]

이용규는 1906년 매부(妹夫)인 민종식과 거의 모의에 참가, 의진 편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홍주 전투에 참가, 전과를 올린 후 체포되어 종신 유형을 받아 1년간 복역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의병 항쟁을 도모하였으며, 1919년에는 조선 가정부 조직에 충남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가계]

이용규목은(牧隱)의 후손으로 임간(林磵)공 은직(殷稙)의 큰 아들로 출생하였다.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용규의 매부(妹夫)이며, 이남규(李南珪)는 족형(族兄)이다.

[활동 사항]

민종식이 1895년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 정산(定山)으로 내려와 뜻있는 인물들을 규합하고 있을 때 이용규는 실질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6년 6월 을사늑약 이후 다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전 참판(參判) 민종식(閔宗植)·선비 박창로(朴昌魯)·안병찬(安炳璨)·이동규(李東珪)·전 참봉(參奉) 최상집(崔相集)·주사(主事) 이상구(李相龜)·전 정위(正尉) 이세영(李世永)·주사 채광묵(蔡光默)·선비 이만직(李晩稙)·주사 박윤식(朴潤植)·사과(司果) 정재호(鄭在鎬)·전 군수(郡守) 민정식(閔廷植)·윤자홍(尹滋洪) 등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군사 7백 명을 모으고 홍주(洪州)에 격문을 보내어 군수를 달래어 함께 협력할 것을 권하였다.

군수 이교석(李敎奭)은 처음에는 호응할 듯하였으나, 일본 군대와 일진회(一進會)의 압력에 굴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거절하였다. 부득이 군사를 대흥광수(大興光水)로 물려 주둔하였다. 이 때 홍주로부터 온 많은 적군과 대적하게 되어 의진은 패하고 군사들은 흩어졌다. 1907년 3월에 다시 전주(全州)와 인천(仁川) 등지에서 모여 의논하고, 진안(鎭安)·용담(龍潭)·장수(長水)·무주(茂朱) 등 여러 고을로 다니면서 군사들을 모아 여산(礪山)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며칠 유진(留陣)한 후 파월포(波月浦)를 건너 서천(舒川) 뒷 동네에 묵었는데 군사가 이미 3백 여 명이 되었다. 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포(藍浦)·오촌으로 들어가 군량을 비축하였다.

4월에 대장기(大將旗)를 홍산(鴻山) 지치(支峙)에 세우고 서천(舒川) 구병동(九兵洞)으로 행군하여 하루를 잤다. 비인(庇仁)·판교(板橋)를 거쳐 남포(藍浦)에 이르러 일본군과 첫 접전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 5~6명을 사로잡고, 다시 광주(廣州)로 진군하여 하루를 머물고 홍주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이긴 후 홍주성으로 입성하였다.

당시 홍주 의진은 만여 명으로서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컸다. 이에 적군은 홍주 탈환을 위하여 인근 지방의 병력을 홍주 일대로 집결시켜 의진을 공략하였다. 의진 역시 몇 차례의 병력 보충과 재편을 통하여 전세를 가다듬었지만 윤 4월 9일[양력 5월 31일]많은 사상자를 내고 홍주에서 탈출하였다. 이때 아군의 피해는 82명이 사망하고, 145명이 체포되었으나, 70여명은 곧 풀려나고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어 최익현(崔益鉉) 의진의 인물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병의 피해도 적지 않아 3백여 명의 인명 손실을 보았다. 이로써 홍주 의진의 전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의진의 군사들은 훈련되지 않은 군사들이었으므로 정규군과의 전투에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홍주성을 탈출한 이용규는 6월에 다시 청양(靑陽) 추치(抽峙)에서 군사 4백 명을 모아 부여(扶餘)·노성(魯城)의 여러 고을로 행군하여 연산(連山) 부흥리(富興里)에 이르러 하루를 머무르고 일본 군사를 만나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상과 같은 이용규의 활약상에 놀란 적군이 이용규의 거처를 확인하고자 하여 6월 17일 이용규의 아내 박씨와 어린 아들 성문(聖文)을 칼로 찌르고 고문하여 아들이 사망하였다.

다시 7월에 온양 석암사(溫陽 石岩寺)에서, 8월에는 공주 노동(蘆洞)에서 유진하였다. 9월 그믐에 정예 군사 수백 명을 비밀리에 예산(禮山) 근처 마을에 매복시키고 그 동안 은신하고 있던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한곡(閑谷)에 살고 있는 족형(族兄)이며 전 참판인 이남규(李南珪)의 집으로 달려가 거사 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을 10월 5일로 정하고, 일단 민종식을 성우영(成佑永)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예산을 습격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2일 일진 회원의 밀고로 이들의 계획이 드러나 김가진(金嘉鎭)의 관군에게 포위되어 이용규를 비롯하여 곽한일(郭漢一)·박윤식(朴潤植)·이석락(李錫樂)·이남규 부자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의 아들 충구(忠求)는 심지어 혀를 깨물면서까지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 모진 악형이 연일 계속되어 결국 누군가의 입을 통하여[성덕기(成德基)는 신창규(申昌圭)라고 하기도 함] 밝혀졌다. 경시청 문답 기록에는 이남규(李南珪)가 자백하였다고 되어 있다.

10월 8일 예산에서 공주로 옮겨져서 심문이 계속되었는데 이때 이용규는 의병을 일으킨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바다 구석에 있는 오랑캐가 제멋대로 뛰놀고 거리낌이 없이 우리 역적의 무리들을 도와 임오(壬午)·갑신(甲申)·갑오(甲午)의 화를 만들어내고, … 또 5적으로 하여금 세력을 길러 우리의 정권을 송두리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에 고문(顧問)을 두어 모든 국권을 저희들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으니, 우리들 5백 년 동안 예의(禮義)를 지키던 백성들로 어찌 이것을 달게 받아 노예가 되겠느냐, 먼저 5적을 베어 우리 황상(皇上)께서 밤낮으로 걱정하시는 것을 없애드리고 이등(伊藤)·장곡천(長谷川)의 머리를 베어 그 임금을 죽인 죄를 징치(徵治)하고, 목인(睦仁)의 아비를 죽이고 대신 임금이된 죄를 성토(聲討)하여 이로써 만세(萬歲) 의 강상(綱常)을 받게 하여 우리 생령(生靈)을 구제할 뜻으로 이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이용규는 공주에서 조치원(鳥致院)을 거쳐 서울로 이감되어 12월 24일 평리원 재판소(平理院裁判所)에서 재판을 받아 1907년 2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5월에 일등(一等)을 감하여 6월에 지도(智島)로 정배되었다가 11월에 특사로 귀양지에서 풀려나 귀향하였다.

1908년 4월 대한 매일 신보 사장 배설(裵說)을 재판에 회부하였을 때, 의병 운동의 허물을 그에게 씌워 활동을 제약할 목적으로, 민종식과 함께 참고인으로 소환되었다. 이용규는 각국 공사관의 공관원들 앞에서 자신의 감옥 생활을 폭로하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8월에는 국채 보상금 모금액을 추심(推尋)하게 하여 외채(外債)를 갚고자 하였으나 대관(大官)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1월 경성 지방 법원으로부터 민종식 등 13인의 홍주 의진 참여자와 같이 다시 호출을 당하였다. 그 이유는 1906년의 비인(庇仁)·판교(板橋) 등지에서 의진에 의해 처형된 일인의 아들이 보상금 11만여원을 청구한 건(件) 때문이었다. 이용규는 재판의 불공정성을 지적하여 단호히 부정하였으나 그 이후 수 차례에 걸쳐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09년 8월 청양(靑陽) 추치(抽峙)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하고, 김창식(金昌植)·이기상(李起常)이 체포되었다. 1911년 5월 매부 민종식이 여주(驪州) 영릉(英陵)의 땅을 개간하려는 것을 '우리 강토를 모두 빼앗겼는데 땅을 개간해서 홀로 잘 살려하느냐'고 극간하여 만류하였다. 10월에 옥천(沃川)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과 전 참의 장남기(張南基)·선비 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 밀고로 일이 누설되어 30명이 체포되었으나 8월에 특사로 다시 석방되었다.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조직을 만들고 군자금을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나 1917년 4월 다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이 일로 경남 통영(統營) 욕지도(欲知島)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 강화 회담에 즈음하여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에 예심원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때 감형하여 주겠다는 판사에게 앉았던 의자를 들어던져 방청객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위로하여 주었다. 1919년에는 조선 가정부 조직(朝鮮假政府組織)에 참가하여 충남 대표로 계속 활약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 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2)
  • 국가 보훈처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