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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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答徐行甫[寒岡集] |
영어공식명칭 | Reply to Seo Haengbo |
이칭/별칭 | 서행보에게 답하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동구 지묘동|달성군 구지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곽명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43년 - 정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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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정구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680년 - 『한강집』에 「답서행보」[한강집] 수록 간행 |
배경 지역 | 연경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동구 지묘동 |
배경 지역 | 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로 1[도동리 35] |
성격 | 서간류|서 |
작가 | 정구 |
[정의]
대구 일대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정구가 조선 후기 문인 서사원과 나눈 문답과 편지.
[개설]
「답서행보(答徐行甫)」[한강집]를 쓴 정구(鄭逑)[1543~1620]는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아버지는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모든 방면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서(禮書)를 편찬하였다. 정구의 성리설(性理說)은 이황(李滉)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특히 『심경(心經)』을 중시하였다. 정구는 말년에 칠곡 사수(泗水)[현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과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일대]로 이거(移居)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대구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유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송원기(宋遠器)·손처눌(孫處訥)·한준겸(韓浚謙)·문위(文緯)·장흥효(張興孝)·이윤우(李潤雨)·허목(許穆)·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서사원[1550~1615]은 본관이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경상북도 성주 팔거현(八莒縣)[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정구를 찾아가 배웠고, 정구는 서사원을 사우(師友)로 대우하였다.
[구성]
「답서행보」[한강집]는 『한강집(寒岡集)』에 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한 편은 문답 형식이다.
[내용]
「답서행보」[한강집]의 문답 형식은 서사원이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절차에 대하여 질문하고 정구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서사원이 『가례』「상례」「소상(小祥)」에서 말한 ‘소상 뒤에는 아침저녁으로 곡하는 것을 그친다’라는 구절에 달린 주(註)에 근거하여 인정상 곡하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정구는 곡을 하여서는 곤란하다고 하며 서사원이 이해하기 쉽게 명확한 답을 내리고 있다. 「답서행보」[한강집]의 3편의 편지 형식은 새해 인사를 전하는 편지와 서사원 마을의 통톡(通讀) 강회(講會)의 재시행을 축하는 편지, 『심경질의(心經質疑)』 간행에 대한 정구의 소견이 담겨 있다. 이 중 1603년(선조 36) 서사원에게 답장한 편지는 이황이 편집한 『심경』에 이황과 나눈 질의를 덧붙여 『심경질의』를 간행하여 세자에게 올린다는 소식에 대한 정구의 생각이 담겨 있다. 체제상에서 다른 사람이 인물의 처신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제거하여 한다는 내용이다.
[특징]
「답서행보」[한강집]는 원 편지에 대한 답은 최대한 간명하게 전달하였다. 주로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자주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많이 표현하였다.
[의의와 평가]
문답 형식의 「답서행보」[한강집]에서 서사원이 질문한 내용은 세세한 예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다. 하지만 정구는 길게 늘어뜨리지 않고 근거와 방법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답서행보」[한강집]는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정구의 학문에 대한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서사원에게 답하는 다른 편지를 통하여 대구 지역에서 성행한 통독 강회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