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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2717
한자 婚禮
영어음역 Hollye
영어의미역 Marriage Ceremony
이칭/별칭 혼인의례,혼인예식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경기도 용인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시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평생의례
의례시기/일시 수시

[정의]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행해지는 일련의 의례.

[개설]

혼인은 가족을 구성하는 최초의 절차로서, 남녀 두 사람의 사회적·경제적인 결합을 기본으로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가족을 이룬다는 지위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두 가문(家門)의 결합이기도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혼례를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였다. 물론 개인의 결합만을 중요시하는 서양의 경우 개인이 혼인을 결정하고, 혼인을 하면 새로운 단위의 가계(家計)를 영위하기 때문에 혼례보다는 혼인 그 자체를 더 중요시하고, 절차 역시 비교적 간단하다.

그러나 개인보다는 두 가문, 혹은 두 가족의 결합을 강조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에서는 혼인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의견이 강하게 작용하고, 혼인을 한 후에도 기존의 공동 가계의 한 부분을 형성하도록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시집살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혼인을 정당화하고 공식화하기 위해서 혼인의례(婚姻儀禮)를 중요시하고, 그 절차와 형식 역시 중요시된다. 따라서 혼례는 남녀 두 사람의 혼인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오늘날 문화적 전통으로 간주하는 유교식 혼례는 고려 후기 『가례(家禮)』의 유입과 시기를 같이한다. 조선시대에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으면서 『가례』에서 규정하는 관혼상제의 네 가지 예법은 한민족의 일생의례를 규정하는 규범으로 통하게 된다. 이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비롯한 다양한 예서(禮書)에서도 『가례』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혼례 역시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이라는 네 개의 의례로 고착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친영의 예는 도입 초기부터 왕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절차였지, 일반 백성들은 행하지 않고 여전히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논란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도 조선 말기가 되면 복수결혼(福手結婚)이나 작수성례(酌水成禮)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유교식 혼례에 비해 비용도 적게 들고, 간단하게 행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신식결혼은 1890년대에 생긴 ‘예배당결혼’이 처음이었다. 1900년대에는 불교계에서도 불식화혼법(佛式花婚法)이 등장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계명구락부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예식장에서 행하는 현대적인 모양의 결혼식이 보급된다.

[절차]

1. 전통혼례

『가례』와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 규정한 혼례의 절차는 의혼(議婚)·납채(納采)·납폐(納幣)·친영(親迎)으로 나누어진다. 집안에 따라서는 주육례(周六禮)에 따라 납채,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의 6단계로 의례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가례』의 예법을 따랐으며, 용인 지역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 의혼

중매인을 통해 양가의 의사를 전달하고 혼인을 의논하는 절차이다. 의혼을 통해 혼인이 허락되면 “혼사(婚事)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용인 지역에서는 주로 중매쟁이를 내세워 의혼을 하였다. 따라서 이를 중매혼이라고 하고, 신랑 신부의 의사에 따르는 것을 연애혼이라고 하였다. 중매쟁이는 부친의 친구나 이웃 일가, 신랑 집안 일가, 신부의 숙모 등 주로 양가의 주변 사람들이어서 연비연사혼(緣比聯査婚)일 가능성이 높았다.

용인 지역에서는 1930년대에 이미 ‘간선’이라고 해서 신랑 될 사람이 지나가는 사람인 체하면서 신부감의 생김새와 동태를 엿보는 경우도 있었다. 1940년대까지는 부모의 의사가 중요시되었지만, 1950년대에는 중매로 만났다고 하더라도 신랑 신부가 연애 기간을 가진 후에 혼인을 하는 사례가 늘었다.

2) 납채

혼인을 받아들이는 것을 공식화하는 절차이다. 신랑집에서는 규정에 따라 ‘청혼서(請婚書)’를 보내는데, 이를 강선(剛先), 강의(剛儀), 강서(剛書)라고도 한다. 이때 함께 보내는 사주(四柱)는 신랑과 신부의 궁합을 보고, 신부의 생리일을 피해 혼인날을 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주단자에는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쓴다.

사주는 청홍색 색실을 감은 싸릿대에 끼워서 청홍색 겹으로 만든 보자기에 싸서 보내는데, 중매장이가 가지고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부집에서는 사주가 도착하면 의관을 정제하고 소반 위에 올려놓고 받았다. 집안에 따라서는 저고리 한 벌을 함께 보내기도 하는데, 이는 신부가 혼례날까지 입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주를 받는 것은 곧 혼인을 승낙하는 것이므로, 혼인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사주를 받지 않는다. 사주를 받으면 신부집에서는 혼인을 허락하는 허혼서(許婚書)와 함께 연길(涓吉)을 보냈다. 연길이란 ‘날받이’라고도 하는데 혼인 날짜를 적은 단자를 말한다. 혼인날은 단순히 길일(吉日)만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사내아이의 잉태 가능성을 점치기 위해 신중을 기했다.

3) 납폐

혼인이 합의된 후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혼인서약을 상징하는 징표를 보내는 절차이다. 허혼서와 연길을 받은 신랑집에서는 납폐를 보낼 준비를 하는데, 이른바 ‘함’이다. 납폐는 납징(納徵)이라고도 하며,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보내는 일종의 혼인 징표이다. 함을 보내는 시기는 예서에 의하면 친영과 함께 행하지만, 주로 초행을 하는 날이고, 함진애비는 주로 첫아들을 낳고 복이 있는 친구가 맡았다. 함진애비의 얼굴에는 숯검정을 묻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다. 용인 지역의 경우 초행과 함께 함이 들어가는 사례가 많아서인지 함팔기의 관행은 보이지 않는다.

함이 도착하면 신부의 어머니가 받아서 상에 올려놓고 함 안에 손을 넣어 처음 잡히는 물건을 꺼낸다. 보통은 붉은색 치마감이 나오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데, 이는 붉은색은 밝은 색이기 때문에 좋다고 인식한다. 이에 비해 남색 치마가 나오면 붉은색 치마보다 덜 좋다고 여겼다.

4) 초행(初行)

신랑이 신부집으로 혼인예식을 올리러 가는 일을 말한다. 초행의 행렬은 청사초롱 두 쌍, 안부(雁夫, 기럭아비), 신랑, 상객(上客), 그리고 후행(後行)으로 구성된다. 상객은 주로 신랑의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 할아버지, 제일 큰형 등이 된다. 용인 지역에서는 신랑 행렬의 경우 가마꾼 두 명·짐꾼 두 명·후행인 부친 한 명, 가마꾼·폐백짐꾼 두 명, 친지대표와 큰형님 두 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신랑의 행렬이 신부집 마을에 도착하면 일반적으로 인접(人接), 또는 대반(對盤)이라는 신부측의 안내인이 나와 ‘사처방’ 혹은 주막이나 다른 집으로 신랑 행렬을 안내하는데, 이를 ‘정방’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위안상이라고 하는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를 하고, 신랑은 혼례복인 사모관대로 갈아입고 때에 맞추어 신부집으로 간다. 용인 지역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으로 들어갈 때 재꾸러미를 퍼부어 옷을 버리기도 하는데, 이는 액을 물리친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5) 전안례(奠雁禮)

신랑이 기러기를 바치고 혼인을 맹세하는 의례이다. 신랑이 신부집에 도착하여 시간이 되면 혼례복으로 갈아입고 전안례를 올린다. 신랑은 신부와 백년해로를 하겠다는 의미로 목기러기를 몸 아래 위로 세 번 옮긴 후 전안상에 올려놓고 절을 한다. 재배를 하면서 “기러기 받아가시오.”라고 하면 신부의 어머니가 목기러기를 치마폭에 감추어 신부가 대기하는 방에 던진다. 기러기가 누우면 딸이고 똑바로 서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이 기러기는 신랑집으로 가지고 간다. 기러기는 음양의 이치를 알고, 지혜가 있으며, 질서를 안다고 하기 때문에 혼례에 사용한다고 한다. 또한 한 번 짝을 맺으면 어느 한 쪽이 죽어도 절대로 다른 짝을 구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속성에 따라 사람도 혼인하여 서로 백년해로를 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6) 대례(大禮)

혼인예식을 올리는 절차를 의미한다. 이 부분이 친영으로 묶인 중국식과 다른 부분이다. 대례의 첫 번째 절차는 교배례(交拜禮)로서 인사를 나누는 절차이다. 대례청은 주로 안마당에 멍석을 깔고 준비한다. 대례상을 중심으로 신랑은 동쪽에, 신부는 수모의 부축으로 서쪽에 자리를 잡는다. 용인 지역에서는 신랑이 주로 대문 쪽에 섰다. 대례상에는 용떡·팥·밤·대추·물 등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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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처인구 혼례 상차림

신랑과 신부가 자리를 잡고 서면 신부가 먼저 재배를 한다. 신랑은 답으로 일배를 하는데, 이때 처인구 지역에서는 신랑이 서는 돗자리 아래에 도토리를 깔아 놓고는, 신랑이 넘어지지 않으면 “신랑이 약고 조신하다.”고 한 마디씩 하였다. 교배례가 끝나면 합근례(合巹禮)를 행한다.

합근례는 둘로 나누어진 표주박으로 술을 서로 교환하여 마심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를 음양의 화합으로 상징하여 청색과 붉은색의 실로 양쪽의 표주박을 연결해 둔다. 음양의 원리에 따라 신랑의 술잔은 초례상 위로 전달하고, 신부의 술잔은 초례상 아래로 전달한다. 술은 세 번 교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합근례를 마치면 들고 있던 닭을 날려 보내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원한다.

7) 관대 벗김

대례가 끝나 신랑이 관복을 벗고 두루마기로 갈아입는 절차를 말한다. 신부는 초야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는데, 처인구에서는 이를 ‘색시놀음’이라고 하였다. 신랑이 옷을 갈아입으면 국수와 술상이 들어오고 신랑과 신부는 식사를 한다. 이때 신부는 대개 뒷간에 갈 걱정 때문에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신랑은 바깥의 손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관례대로 처가에서 신방을 꾸민다. 첫날밤을 치를 때면 사람들은 “상직한다”, “신방 지킨다”, “신방 엿본다”고 하면서 문구멍을 뚫고 구경을 하는데, 촛불이 꺼져야 모두 돌아간다. 지역에 따라서는 대례 당일 오후 3시쯤 시댁으로 가서 폐백을 드리고 다시 신부집으로 와서 초야를 치르기도 하였다.

8) 신행(新行)

신부집에서 혼례식을 마치고 신부가 신랑집으로 들어가는 절차를 말한다. 초야를 치른 신혼부부는 대개 신부집의 형편에 따라 하루나 삼 일에서, 길게는 일 년 이상 묵는다. 이 기간이 지나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가는 것을 신행, 또는 우귀(于歸)라고 한다. 신부집에서 묶는 날수에 따라 삼 일이면 ‘삼일신행(우귀)’이라고 하고, 달을 넘기면 ‘달묵이’, 해를 넘기면 ‘해묵이’라고 하였다. 신행을 하면 신랑집에서는 친지와 이웃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다.

신부는 예복을 갖추어 입고 신랑이 타고 온 가마를 탔으며, 신랑은 신부집에서 준비한 말을 타고 갔다. 기흥구처인구 지역에서는 신랑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한쪽 발을 부뚜막에 올려놓고 막대주걱을 거꾸로 들고 가마솥에서 국수를 퍼서 바가지에 담아 먹었는데, 그래야 백년해로를 한다고 믿었다. 이때 신랑집에서도 잔치를 벌인다.

9) 현구고례(見舅姑禮)

신부가 신랑 친척에게 인사를 하는 절차로, 폐백(幣帛)이라고도 한다. 폐백에 올리는 음식은 신부집에서 장만한 것으로, 폐백은 신랑집의 잔치가 끝나면 바로 행한다. 폐백을 받을 대상은 시부모와 형제, 조카 들이다. 처인구에서는 시아버지가 “아들 삼 형제, 딸 둘만 낳아라.”고 축원하면서 대추와 밤을 던져 주었다. 이때 대추는 아들, 밤을 딸을 상징한다고 하며, 아이가 빨리 들어서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밤과 대추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신랑 신부가 나누어 먹었다.

폐백은 신부가 신랑의 집단에 새로이 영입된다는 입사식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요즘에는 예식장에서 이 모든 행사를 마무리한다. 처인구에서는 신행 후 신부는 이틀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삼 일째 되는 날부터 밥을 짓는 등 부엌일을 한다. 밥을 지을 때는 친정에서 주발에 담아 온 찹쌀을 넣는다. 이는 “찰지게 잘 살아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초례상에 올린 팥은 반드시 솜을 덮어서 가지고 오는데, 이는 “솜처럼 훈훈하게 부자가 되라”는 의미가 있다.

10) 재행(再行)

신행 후 신랑이 처가에 인사를 하러 가는 절차이다. 용인 지역에서는 이를 ‘재향’이라고 한다. 재행을 할 때는 엿 한 동구리와 인절미 한 말, 술을 준비하기도 한다. 보통 신행 후 삼 일이나 칠 일이 지나면 재행을 하는데, 신랑은 처가 마을의 동년배들로부터 ‘동상례’ 혹은 ‘신랑다루기’, ‘신랑달아매기’를 당한다.

처인구에서는 동네 청년들이 “남의 마을 색시를 훔쳐 갔으니 한잔 사야 한다. 술 몇 말, 고기 얼마?”라고 질문하면 신랑은 무조건 위기를 모면하려고 “너희들 원하는 만큼.”이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신랑이 신부의 집단에 들어가는 입사식(入社式)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11) 근친(謹親)

혼인 후 일 년이 지나 떡과 인절미, 술 등 음식을 만들어 친정에 인사를 가는 것을 근친이라고 하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 년째 되는 해에 가기도 했다. 신부집에서는 이 음식으로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였으며, 신랑 신부를 신랑집으로 되돌려 보낼 때도 역시 같은 음식을 해 보냈다.

2. 현대식 혼례

신식혼례라고도 부르는 현대식 혼례는 문화적 전통에 따른 유교식 혼례를 구식혼례라 치부한 결과 이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다. 신식결혼식이 구식혼례와 크게 다른 점은 식장과 복식이다. 신식혼례에서 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면사포를 쓰고 드레스를 입으며, 대개는 전문 예식장에서 예식을 치른다.

오늘날에도 중매혼이 많지만 연애혼이나 중매와 연애를 절충한 사례도 많다. 중매혼이라 하더라도 신랑과 신부가 맞선을 보고 일정 기간 연애를 한 후 혼인을 결정하기도 하며, 특히 구식혼례에는 없는 약혼식이 신식혼례에서는 대단히 중요시되어, 사주를 보내는 절차 대신 약혼식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 처인구 모현면[현 모현읍]에 사는 P씨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중매는 신부의 큰어머니가 하였고, 중매인의 집에서 상견례라는 명목으로 신랑될 사람과 신부될 사람이 처응 대면을 한 다음날 용인시내 다방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였다. 약 2개월 정도 교제한 후 약혼식을 하였다. 약혼식은 신부집에서 마련하였는데, 예물을 교환하고 양가 부모가 상견례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신랑의 친구가 사회를 보면서 양가 가문을 소개하고, 양가 대표가 인사를 한 후 가족을 소개하였다. 여흥으로는 당사자의 노래를 듣는 정도였다.

택일은 신랑집에서 하였고, 함은 결혼식 일 주일 전에 첫아들을 낳은 신랑의 친구가 메고, 다섯 명이 동행하였다. 함은 신혼여행 때 사용할 여행 가방으로 하였다. 내용물은 사주단자와 폐백인 양장 한 벌, 한복 한 벌, 겨울용 코트감과 예물반지, 목걸이, 시계 등이었다. 사주단자는 한복집에서 파는 서식을 사서 직접 작성하였다.

함팔기는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실랑이를 벌여 마을 주민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신부측에서는 처남과 처남댁, 신부의 자매, 친구들이 동원되어 함을 억지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고 한다. 신부집에서는 흰 봉투에 ‘함값’을 넣어 함진애비의 발밑에 끼우며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였다. 함이 들어오자 신부 어머니는 마루에 차려놓은 빈 상에 함을 올려놓고 채단을 꺼내 보였는데, 이때 붉은색이 나와서 모두 첫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예식은 농협구판장에서 하였으며, 비용은 반반씩 부담하였다. 당시 축의금은 약 2천 원에서 4천 원 정도였다. 예식을 마친 후 예식장의 폐백실에서 6촌 이내의 친척들을 대상으로 폐백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 신랑 신부는 피로연 장소에 가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인사가 끝난 후 친척의 고급 승용차를 빌려서 김포공항으로 갔는데, 친구들이 동행하였다.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고, 일정은 2박 3일간이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신부집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전통식으로 생각하면 재행이 되는 셈이다. 다음날 시집으로 갈 때 전문점에서 맞춘 이바지 음식을 들고 갔다. 시집에서는 삼 일간 문안인사를 하고, 삼 일째부터 부엌일을 하였으나, 오후에 신혼살림집으로 와서 더 이상의 시집 살림은 하지 않았다. 일 주일쯤 후에 친구들을 불러 음식대접을 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5.14 행정지명 현행화 모현면에서 모현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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