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09 |
---|---|
한자 | 李翊 |
영어음역 | Lee Ik |
이칭/별칭 | 계우,농재,문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안장리 |
[정의]
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문신.
[개설]
이익은 효종 대에서 숙종 대까지 활동한 문신으로, 송시열을 추종하여 치열한 사색당쟁 속에서 노론과 성쇠를 같이 하였다. 1659년 정언(正言)이었을 때는 술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대신을 탄핵하여 강직함을 드러냈으며, 1674년 송시열이 유배된 뒤 계속된 탄핵으로 양덕(陽德)으로 귀양 갔다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후 1682년 송시열이 사직하자 역시 사직하고 고향인 용인으로 돌아갔다.
1689년(숙종 15) 소의장씨(昭儀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인 장흥(長興)에서 죽었다. 4년간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출입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청렴하였으나 혼란한 세태로 인해 수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가계]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계우(季羽), 호는 농재(農齋).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이할(李劼)의 손자이며, 윤홍유(尹弘裕)의 외손자이다. 아버지는 호조참의 이유겸(李有謙)이다. 부인은 셋인데 첫째는 나주박씨로 박순(朴淳)의 딸이며, 둘째는 완산이씨로 이우량(李宇梁)의 딸, 셋째는 청송심씨로 심지엄(沈之淹)의 딸이다.
[활동사항]
1652년(효종 3)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57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 사서(司書)가 되었다. 사간원정언을 거쳐 1660년(현종 1)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이때 송시열을 비판하는 유생 유세철(柳世哲)을 탄핵하는 등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서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 원양도관찰사(原襄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숙종이 즉위한 뒤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679년에 유배를 가기도 했으나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기용될 때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대사헌(大司憲),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82년(숙종 8)에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한 때 낙향하였다가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688년(숙종 14)에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및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유배되어 죽었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쫓겨난 뒤에 복권되어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교잡록(受敎雜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묘소]
묘소와 묘표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