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의 역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1208
한자 寧越- 驛院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윤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영월의 역원 - 강원도 영월군
성격 숙박 시설

[정의]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 시대 여행을 하는 관리를 위한 숙박 시설.

[개설]

역원(驛院)은 근대 이전에 육상교통로의 요지에 자리한 시설로서, 역(驛)은 공적 교통통신 시설, 원(院)은 공사(公私)의 여행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역(驛)과 원(院)은 기본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과 통신망의 일부이므로, 일반적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으로 뻗은 도로상에 있었다. 역(驛)은 공적인 일로 여행하는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관리에게 말을 바꾸어 주는 일을 맡아보는 공적 기관이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어사 출두할 때 꺼내 보이는 마패(馬牌)는 바로 역에서 제공하여야 하는 말의 숫자를 그려 놓은 패(牌)이다. 『경국대전』에서는 역을 30리[11.8㎞]에 하나씩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정하여 놓았다. 이러한 역에 비하여 원(院)은 반드시 공적인 일로 여행하는 사람만이 묵을 수 있는 관영 시설은 아니었다. 역원(譯院)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역에 대해서는 과거의 자료가 많기 때문에 기존의 연구도 많고 상당히 정리되어 있는 반면 원에 대해서는 연구도 많지 않고 정확하게 정리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영월에는 공식적으로 두 군데의 역과 두 군데의 원이 있었다.

[영월의 역원]

영월의 역(驛)과 원(院)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연평(延平)과 양연(楊淵) 두 개의 역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연평역(延平驛)이 군의 북쪽 35리[13.8㎞]에 있고, 양연역(楊淵驛)이 군의 서쪽 16리[6.3㎞]에 있으며, 제덕원(濟德院)은 군의 북쪽 40리[15.7㎞]에 있고, 용정원(龍井院)은 군의 서쪽 40리[15.7㎞]에 있다고 하였다. 원은 산솔면화원리(禾院里)영월읍 연하리의 복덕원(福德院) 같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공식적인 것 이외에도 여러 군데 있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영월의 역은 보안도(保安道)에 속하였다. 보안도는 춘천 동쪽에 있는 보안역(保安驛)의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구역으로, 여기에는 보안(保安)·안보(安保)·인람(仁嵐)·부창(富昌)·원창(原昌)·연봉(連峯)·천감(泉甘)·창봉(蒼峯)·갈풍(葛豐)·오원(烏原)·안흥(安興)·운교(雲交)·방림(芳林)·대화(大和)·진부(珍富)·횡계(橫溪)·유원(由原)·안창(安昌)·단구(丹丘)·신림(神林)·신흥(神興)·양연(楊淵)·연평(延平)·약수(藥水)·평안(平安)·벽탄(碧呑)·호선(好善)·여랑(餘浪)·고단(高丹)·임계(臨溪) 등이 속하는 도로였다. 이러한 자료를 통하여 조선 시대 영월의 역은 초기부터 후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대동여지도』의 영월군에는 연평역과 양연역은 역 표시가 되어 있지만, 용정원은 고을의 이름만 나오고 제덕원은 보이지 않는다. 1918년 간행된 5만분의1 지도에 나타나는 북면 연평리는 연평역 자리이고, 남면 연당리는 양연역 자리이며, 북면 원동(院洞)은 제덕원 자리이고, 한반도면 쌍용리(雙龍里)용정원 자리이다.

[위치]

영월의 양연역은 현재 남면 연당리에 있었는데, 연당리라는 이름은 ‘양연(楊淵)’과 ‘승당(昇堂)’에서 한 자씩을 따서 ‘연당(淵堂)’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현재 양연은 남면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연평역은 현재 북면 연덕리(延德里)에 있었다. 연덕리연평(延平)과 덕하(德下) 마을에서 한 자씩 딴 것이다. 연평연덕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연덕초등학교, 연덕보건지소 등이 있다.

영월의 제덕원은 현재 북면 덕상리에 있었는데, 원이 있었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이 원동(院洞)이었다. 제덕원은 일찍이 원의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유는 연평역과 원동 사이의 거리가 1㎞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원동이라는 마을의 이름도 원동로라는 도로 이름이나, 영월과 평창 사이에 있는 원동재, 그리고 원동재터널 등으로 그 흔적을 남아 있을 뿐이다.

영월의 용정원은 현재 한반도면 쌍용리에 있었는데, 현재 용정원길이라는 도로 이름으로 남아 있다. 용정원은 제천에서 영월로 가거나 주천에서 영월로 갈 때 지나는 길목에 있었다.

[의의와 평가]

영월의 역원은 20세기 초에도 여전히 이름을 유지하면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자동차도로와 철도가 놓이기 전까지는 조선 시대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용정원과 양연역은 제천에서 영월로 들어오는 길에 지나는 중요한 마을이었고, 영월에서 평창으로 가는 길의 양연역과 제덕원도 1918년까지는 그대로 이용되고 있었다. 현재도 거의 비슷한 노선을 가고 있다. 용정원과 양연역은 국도 제38호선상에 있었고, 양연역과 제덕원도 국도 제31호선상에 있었는데, 국도 제38호선이 자동차전용도로가 되고, 국도 제31호선도 노선을 직선화하면서 영월의 역원은 약간 비껴난 곳에 있다.

이건(李健)[1614~1662]의 『규창유고(葵窓遺稿)』에서는 제천에서 양연역이 40리, 양연역에서 영월이 20리[7.8㎞], 영월에서 연평역이 35리[13.7㎞], 연평역에서 평창(平昌)이 35리라고 하였으므로, 17세기에도 영월군의 도로는 현재 국도 제38호선국도 제31호선 노선과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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