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봉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조선 시대 가옥. 경수당종택(慶壽堂宗宅)은 박세순(朴世淳)[1539~1612]이 건립한 가옥이다. 박세순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공검(公儉), 호는 경수당(慶壽堂)이다. 영해 원구리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후방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군자감정의 직을 맡았았고, 조카 무의공 박의장이 경주와 울산 등지의 전투에서 군량미가 떨어져 곤경에 처하자...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구봉서원(九峯書院)은 박의장(朴毅長)[1555~1615]·박홍장(朴弘長)[1558~1958] 형제를 제향하기 위해 1665년(현종 6) 구봉정사(九峯精舍)로 처음 설립하였고, 1785년(정조 9)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제향자 박의장의 본관은 무안(務安), 호는 청신재(淸愼齋),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무관으로서 관직은 경상좌...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조선 후기 누정. 금서헌(琴書軒)은 박륵(朴玏)[1594~1656]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박륵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숙헌(俶獻), 호는 금서(琴書), 아버지는 박의장(朴毅長),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회령판관·도총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가옥. 영덕 난고종택(盈德蘭皐宗宅)은 원구전통마을에 세거하는 영양남씨 종택이다. 영양남씨는 남준(南峻)[1474~1550]이 평해에서 원구리로 이거한 이래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난고종택은 남경훈(南慶薰)[1572~1612]의 큰아들인 안분당 남길(南佶)[1595~1654]이 건립하였다. 남경훈의 자는 응화(應和), 호는 난고...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가옥. 영덕 난고종택(盈德蘭皐宗宅)은 원구전통마을에 세거하는 영양남씨 종택이다. 영양남씨는 남준(南峻)[1474~1550]이 평해에서 원구리로 이거한 이래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난고종택은 남경훈(南慶薰)[1572~1612]의 큰아들인 안분당 남길(南佶)[1595~1654]이 건립하였다. 남경훈의 자는 응화(應和), 호는 난고...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원구리에 있는 조선 후기 누정. 영덕 상의당(盈德尙義堂)은 백충언(白忠彦)[1538~1609]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백충언의 본관은 대흥, 자는 언지(彦之), 상의당(尙義堂)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다. 1874년(고종 11)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원구리에 있는 조선 후기 누정. 영덕 상의당(盈德尙義堂)은 백충언(白忠彦)[1538~1609]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백충언의 본관은 대흥, 자는 언지(彦之), 상의당(尙義堂)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다. 1874년(고종 11)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1리에 있는 대흥백씨 집성촌. 대흥백씨는 충청남도 예산군을 관향으로 하고, 백문보(白文寶)를 득관조로 하는 성씨이다. 원구리 대흥백씨는 1566년에 백인국(白仁國)[1530~1613]이 창수면 인량리에서 원구마을로 입촌한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영양남씨, 무안박씨와 더불어 세 성씨가 나란히 정립하는 집성촌을 이루었다....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1리에 있는 무안박씨 집성촌. 무안박씨는 전라남도 무안군을 관향으로 하고, 박진승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원구리 무안박씨는 1500년대 초 박양기(朴良基), 박영기(朴榮基) 형제가 처음 입촌한 이후 박영기의 사남 경수당(慶壽堂) 박세순(朴世淳)[1539~1612]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영양남씨, 대흥백씨와 함께 세 성씨가 나란히 집성촌을 이루었다....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1리에 있는 영양남씨 집성촌. 영양남씨는 경상북도 영양군을 관향으로 하고, 남민을 시조로 한 성씨이다. 원구리 영양남씨는 15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남비(南秠)와 남한립(南漢粒) 부자가 입촌한 이후, 난고(蘭臯) 남경훈(南慶薰)[1572~1612]을 위시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자손들이 번성하여 무안박씨, 대흥백씨와 함께 나란히 집성촌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