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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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適道 |
이칭/별칭 | 호계(虎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출생 시기/일시 | 1574년 - 신적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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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신적도 진사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신적도 상운도 찰방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63년 - 신적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67년 - 신적도 호조 참의에 추증 |
활동지 | 상운도 - 강원도 양양군 |
활동지 | 건원릉 - 경기도 구리시 |
사당|배향지 | 단구 서원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
성격 | 관료|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증 호조 참의(戶曹 參議)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관료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호계(虎溪). 아주 신씨 의성읍 파조(派祖) 신광부(申光富)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신원록(申元祿)이고, 아버지는 신흘(申仡)이고, 동생은 신달도, 신열도이다.
[활동 사항]
신적도(申適道)[1574~1663]는 청년기에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에게 배웠다. 학문과 효행이 뛰어 났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피난길에 나서고 국사가 어지러운데 신하된 사람으로 산하에 묻혀 구차하게 생활을 도모할 때가아니다.” 하며 원근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밤낮 달려가니 이미 화의를 맺어 적이 물러간 뒤라 어전에 소장을 올려 장한 일이란 비답(批答)을 받고 나라로부터 상운도 찰방(祥雲道 察訪) 벼슬이 내렸다.
병자호란 때에도 의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으며, 이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척화하는 것이 당연한 일. 어찌 강화파들은 반대한단 말인가? 오랑캐가 겁나 두려워함이라. 망국꼴 보려는 왕손매의 심정이구나.” 라는 척화시(斥和詩) 읊었고, 군사와 양곡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 건원릉 참봉(健元陵 參奉)의 벼슬이 내려졌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기 위해 서울에 가서 사은(謝恩)의 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학리의 학소대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날마다 『춘추(春秋)』를 읽으며, 비분강개(悲憤慷慨)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소주(韶州) 산곡에 대명(大明)의 일월이 비친다고 했다.
[저술 및 작품]
생전에 쓴 글을 모은 『호계문집(虎溪文集)』 6권 3책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67년(고종 4) 이조 참의 증직이 내려졌으며, 단구 서원(丹邱 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