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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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召文城 |
이칭/별칭 | 금성산성,금학산 고성,금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형기 |
제정 시기/일시 | 673년 9월 - 조문성 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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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 지역 | 조문성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 정상부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성.
[개설]
의성군 금성산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성으로 조문군(召文郡)의 군치(郡治)가 금성면 일대였음을 입증하는 유적이다.
[형성 및 변천]
조문성은 기록을 통해 볼 때, 금학산 고성, 지금의 금성산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문성이 위치한 금성면 일대는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즉 소백산맥 안팎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 경상북도 경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에 위치하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절대 요충지였다. 이러한 곳에 조문성이 축성되었다는 것은 이곳이 곧 조문군의 군치로서 당시 이 지역의 중심지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금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문성이라 부른 것은 경주의 왕성이 금성이라고 불린 연유도 있을 것이다. 한편 ‘조문’의 한자 표현인 ‘조문(召文)’은 곧 ‘금(金)’을 의미하였으며, ‘조문성(召文城)’ 자체가 ‘금성(金城)’이라고 보기도 한다.
현재 의성 지역에는 10여 개소에 성곽이 있었으나 현재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금성산성, 의성읍의 치선리 산성터, 단촌면의 병방리 산성터, 옥산면의 금학리 산성터[황산성], 안계면의 봉양리 산성터 등 5개소뿐이며, 그 중 금성산 정상을 중심으로 동쪽의 능선까지 약 4㎞ 가까이 토·석(土石) 혼축의 성벽이 남아 있는 금성산성은 시기를 달리하며 여러 차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산성에서 북서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의성 금성산 고분군이 있어 이곳이 고대 의성 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알게 해 준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조문성의 정확한 위치는 『대동지지』 의성 성곽조에 “금학산 고성은 금성이라고도 한다. 둘레가 9,100척이며 높고 험하며 네 곳의 우물이 있다. 신라 문무왕 13년에 축조한 조문성이 이것이다.[金鶴山古城一云金城 周九千一百尺 高險 有四泉 新羅文武王十三年 築召文城者是]”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금성산성이 조문성임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관련 기록]
의성 지역의 성곽 축조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고 난 후인 673년(문무왕 13) 9월에 “국원성, 북형산성과 함께 조문성도 축조하였다.[築國原城北兄山城召文城]”는 기사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다. 조문성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위의 『대동지지』에 전하는 내용으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