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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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英基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영성 |
출생 시기/일시 | 1918년 - 홍영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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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43년 - 홍영기 일본 도호쿠 대학 법문학부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홍영기 비밀 결사 ‘우리들’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 홍영기 육군 본부 법무감실 법무 차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홍영기 육군 본부 병무 차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 홍영기 변호사 개업 |
활동 시기/일시 | 1960년 7월 - 홍영기 제5대 민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65년 - 홍영기 제6대 국회 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71년 - 홍영기 제8대 국회 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85년 - 홍영기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 부의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88년 - 홍영기 제13대 국회 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90년 12월 - 홍영기 평화 민주당 부총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92년 - 홍영기 제14대 국회 의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92년 - 홍영기 민주당 상임 고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94년 6월 - 홍영기 제14대 국회 부의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99년 2월 - 홍영기 사망 |
출생지 | 홍영기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 |
활동지 | 홍영기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 |
성격 | 정치인|법조인 |
성별 | 남 |
본관 | 남양(南陽) |
대표 경력 | 제14대 국회 부의장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정치인이자 법조인.
[활동 사항]
1. 독립운동과 법조인으로서의 활동
홍영기(洪英基)[1918~1999]는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창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1943년 일본 도호쿠 대학[東北大學校]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43년 김창옥(金昌沃)·강수원(姜壽元)·박석우(朴錫祐)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우리들’을 결성·활동하다가 1944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1945년 출옥하였다. 1948년 육군 법무관 중위로 임관하였으며, 1950년 육군 본부 법무감실 법무 차감[중령]을 역임하였다. 법무관 시절 특무 대장 김창룡(金昌龍)의 용공 조작 지시를 거부한 바 있으며, 1949년 김구 선생 암살 사건 때는 검찰관으로서 살해범 안두희에게 총살형을 구형하기도 하였다. 1952년 육군 본부 병무 차감이 되었고 이듬해 육군 대학을 졸업하였다. 1954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으며 이후 재야 법조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 정치 활동
한편 홍영기는 정계에 진출하여 1954년 제3대 국회 의원 선거, 1958년 제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전라북도 순창에서 나와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 이후 1960년 7월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순창에서 입후보하여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를 꺾고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신파의 소장파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65년 제6대 국회 의원 보궐 선거[서대문 을구]에서 민중당 공천으로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 의원 선거[성동 을구]에서는 낙선하였으나, 1971년 제8대 국회 의원 선거[성동 을구]에서는 신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하였고, 제11~12대 국회 의원 선거에는 정치 규제에 묶여 출마하지 못하였다.
그 사이 유신 체제를 반대하고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다가 국군 보안 사령부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1984년 민주화 추진 협의회[약칭 민추협] 상임 운영 위원, 1985년 민추협 부의장이 되었다. 통일 민주당 정무 위원으로 있을 당시 당의 헌법 개정 심의 위원에 참여, 전문과 사법부편을 기초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임실·순창]에 평화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 당선되었으며, 1990년 12월 평화 민주당 부총재가 되었다. 이후 신민주 연합당[약칭 신민당] 당무 위원 겸 전당 대회 의장, 민주당 당무 위원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임실·순창]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 최고령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 6월 이후 민주당 당무 위원, 민주당 상임 고문을 지냈다. 1994년 1월 민주당 우루과이 라운드 대책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데 이어 그해 6월에는 제14대 국회 후반기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새 정치 국민 회의를 창당하고 정계에 복귀한 뒤 그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민주당 잔류를 선택하였으며, 박일(朴一)과 함께 민주당 공동 대표에 선임되었다. 1999년 2월 세상을 떠났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