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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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允淑 |
이칭/별칭 | 윤숙(允淑),춘계(春溪),양춘영(楊春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임숙정 |
출생 시기/일시 | 1875년 12월 2일 - 양윤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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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9년 4월 27일 - 양윤숙 일본군과 교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9월 9일 - 양윤숙 수비대 통역 박찬탁 사살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2월 3일 - 양윤숙 김제에서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10년 4월 14일 - 양윤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양윤숙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양윤숙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 국화촌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 |
본관 | 남원(南原) |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춘계(春溪), 본명은 양춘영(楊春泳). 아버지는 양석민(楊錫民), 어머니는 해주 오씨이다.
[활동 사항]
양윤숙(楊允淑)은 1875년 12월 2일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천리(錦川里) 국화촌(菊花村)에서 세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1906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돈헌(遯軒) 임병찬(林秉瓚)이 일으킨 의병에 참여하면서부터 의병이 되었다. 『돈헌 유고(遯軒遺稿)』 권6 창의 일기를 보면 “초 6일, 양윤숙으로 하여금 순창 삼방의 포수 채영찬을 데려오게 하였다. …… 16일 순창읍에 들어갔는데 황균창·김갑술·양윤숙 등이 각각 포수 수십 인을 거느리고 찾아와서 따랐다”라는 등의 내용이 있다. 양윤숙은 최익현의 순창 거의가 실패한 뒤 회문산 근처의 의병들을 모아 의병 부대를 설립하였다. 이때 그 부대원에는 도총독(都總督) 양윤숙, 좌선봉(左先鋒) 최화(崔華), 우선봉(右先鋒) 임순호(任洵鎬), 중군(中軍) 최산흥(崔山興), 후군(後軍) 이국찬(李國贊), 향관(餉官) 서기협(徐基俠), 교련관(敎鍊官) 한자선(韓自善)이 있었다. 이 외에도 강덕일(姜德日)·강한용(姜漢用) 등 많은 인물들이 이 소속 의병으로 밝혀졌다.
양윤숙의 활동은 재판 기록과 『한국 독립운동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주로 1909년의 활동 기록이 남아 있다. 4월 27일에는 순창군 오산면 우곡리(牛谷里)에서 양윤숙의 부하 최삼형(崔三亨)이 의병 20명을 데리고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5월 7일에는 순창군 적성면 관평리(官坪里)에서 소속 의병 11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화면(仁化面)[현재의 인계면] 방면으로 몸을 피하였다. 이후 6~8월의 활동은 알 수 없으며, 9월 9일 순창군 하치면 피노리(避老里)[[현재의 쌍치면 피노리]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 통역 박찬탁(朴贊鐸)이 순창군 구암면 구산동(龜山洞)[현재의 구림면]을 순찰하다가 양윤숙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다시 활동상이 드러난다. 9월 29일에는 순창군 복흥면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10월 2일 경찰이 양윤숙을 체포하기 위하여 순창군 무림면 문치리(文峙里)[현재의 구림면]라는 곳을 갔으나 잡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당시 회문리를 문치리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양윤숙의 활동은 전주 수비대 육군 소위 이마이즈미 스에 온다[今泉季雄]와 전라북도 사무관 김진현(金鎭賢)이 쓴 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양윤숙은 순창 지역을 중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나 부하들 중에 체포되거나 낙오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부대는 힘에 겨워졌다. 결국 1년 5개월 동안의 활약을 끝으로 1909년 12월 3일 김제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단신으로 붙잡혀서 1910년 4월 14일 사형을 당하였다. 교수형을 집행할 때 일본의 신문사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 1970년대에 동아 일보사에 보내졌는데 유족인 양병관이 보관하다 손질 후 1986년 3월 1일 『동아 일보』에 실려 양윤숙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