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500 |
---|---|
한자 | 古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백제,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곽장근 |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전라북도 순창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삼한 시대]
삼한 시대는 초기 국가 시대인 삼한의 정립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마한에 54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한의 영역이 오늘날 경기 서해안,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등에 걸쳐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마한의 소국은 대체로 현재 군 단위마다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창군에는 마한 소국 중 소석색국(小石索國)이 있었다고 본다. 정인보(鄭寅普)의 견해에 따르면, ‘소석색’은 ‘잔돌새’로 읽히며 잔돌이 ‘역(礫)’으로 백제 때 '□평현(坪縣)'이고 그 뒤 '□성현(城縣)'으로 변하였으니 현재 순창 적성현지(赤城縣址)라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백제의 역평현(礫坪縣)을 신라 때 적성현(赤城縣)으로 고쳐 순화군[현재 순창군]의 영현으로 하였다고 하므로 소석색국은 곧 순창의 적성현임이 확실하다.
고고학에서는 서력기원(西曆紀元) 개시 전후부터 300년경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을 원삼국 시대(原三國時代)라고도 부른다. 1970년대 고고학계에서 처음 제기된 시대 구분법으로 청동기의 소멸과 함께 철 생산의 성행, 고인돌의 소멸, 김해식 토기가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전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널무덤[목관묘]과 덧널무덤[목곽묘], 독무덤[옹관묘]이 더욱 대형화되고, 여기에 지역성이 강한 주구묘(周溝墓)와 분구묘(墳丘墓),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이 새롭게 출현한다.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내월 마을과 풍산면 대가리 향가 유적에서 원삼국 시대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그 평면 형태가 말각방형(抹角方形) 또는 장방형(長方形)으로 벽주공(壁柱孔)과 벽구(壁溝), 부뚜막, 배수로, 장타원형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일부 주거지에서 불에 탄 목재와 불에 그을린 벽체의 흔적도 드러났다. 유물은 장란형(長卵形) 토기를 비롯하여 바리 모양 토기[발형 토기], 항아리 모양 토기[호형 토기], 시루, 주구 토기(注口土器)[주둥이가 있는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유구의 속성 및 유물의 조합상에서 호남 서부 지역에서 밝혀진 마한과의 관련성이 입증되었다.
또한 원삼국 시대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말무덤이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에서 조사되었다. 이 지역은 백제 역평현이 설치된 곳으로 섬진강이 둥글게 휘감아 돌면서 평야가 발달하였고, 그 북동쪽에서 오수천(獒樹川)이 섬진강의 본류에 합류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논에 6~8기의 말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말무덤은 섬진강이 흐르는 방향과 평행되게 4기가 일렬로 그 나머지도 열(列)을 달리하며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 대가 마을에도 말무덤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순창군 풍산면 대가리는 섬진강 본류에 경천(鏡川)이 합류하는 곳으로 평야와 구릉지가 넓게 펼쳐져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못지않게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말무덤의 ‘말’은 마(馬)의 뜻으로 보고, ‘말’은 ‘머리’ 혹은 ‘크다’ 뜻으로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관형사로 파악하여 그 피장자는 마한의 지배층으로 추정하고 있다. 흔히 왕사슴을 말사슴, 왕고추잠자리를 말고추잠자리, 왕매미를 말매미, 왕벌을 말벌로 부르는 것과 똑같다. 현지에서 말무덤 혹은 몰무덤이라 불리는 것은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와 대강면 사석리·방산리,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에서 발견되었다. 섬진강 중류 지역에서만 말무덤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섬진강 상류와 하류 지역에서는 말무덤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를 제외하면 1970년대 경지 정리 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 모두 유실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에는 본래 7기 내외의 말무덤이 논 속에 일렬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원 입암리 말무덤 발굴 조사에서 그 성격이 마한의 분구묘로 밝혀졌다. 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말무덤을 근거로 원삼국 시대 때도 여전히 순창이 거점 지역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순창군을 중심으로 한 섬진강 유역에서 마한의 지배자 무덤인 말무덤이 어느 시기 일시에 자취를 감춘다. 말무덤이 가야계 고총(古塚)으로 발전하는 백두대간 동쪽과 달리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아마도 한성기 백제가 금강과 섬진강을 잇는 간선 교통로를 따라 진출하여 순창군을 백제의 영향권에 편입시킨 결과로 판단된다. 마한의 말무덤이 자취를 감춘 이후에는 가야계 고총을 비롯한 어떤 유형의 수장층 분묘 유적도 조영되지 않았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에 순창군 지역의 가장 큰 특징은 백제와 가야 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백제가 한성기 간선 교통로를 따라 순창군 등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호남정맥을 넘어 순창군 일대로 진출하는 것과 가야가 백두대간을 넘어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섬진강 유역을 완충 지대로 설정하려는 백제의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 있다. 고구려 남진 정책의 강화에 따른 후방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호남정맥 서쪽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과 백두대간 동쪽 가야 세력이 연대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창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의 실체와 그 발전 과정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삼국 시대 문화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미진한 것과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백제 때 순창군 순창읍에는 도실군(道實郡)이, 적성면에는 역평현이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순창군의 건치 연혁에 본래 백제의 도실군을 신라 시대에 순화군으로 고쳤다고 나와 있다. 이를 증명해 주듯이 순창군 삼국 시대 분묘 유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백제계 분묘 유적이다. 이제까지의 지표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백제의 행정 치소와 교통의 중심지에 규모가 큰 삼국 시대 분묘 유적이 산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와 신남리, 동계면 관전리는 백제 행정 치소와 관련된 분묘 유적들로 그 규모가 방대하다. 종래에 섬진강 유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백제계 분묘 유적 중 그 규모가 대형에 속한다. 게다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순창군과 인접된 남원시 못지않게 삼국 시대 분묘 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것도 순창군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백제가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순창군을 얼마나 중요시 했던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와 팔덕면 월곡리에서 구덩식 돌덧널무덤과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 조사되었다. 돌덧널[석곽]은 그 평면 형태가 장방형을 띠고 있으며, 유구의 장축 방향은 대부분 남북으로 두었다. 벽석은 대체로 할석을 옆으로 눕혀 축조하였으며, 앞트기식[횡구식]과 굴식[횡혈식]은 그 입구를 남쪽에 두었다. 섬진강 부근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벽석은 대부분 할석을 사용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이제까지의 지표 조사를 통해 밝혀진 분묘 유적의 특징은 다른 지역에서 조사된 백제계 분묘 유적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
삼국 시대 돌덧널무덤에서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가 출토되었다. 유물은 주로 북벽에 치우쳐서 부장되었으며, 일부는 돌덧널의 남쪽에서도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병이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와 아가리가 넓은 목 긴 항아리[광구 장경호], 세발 토기[삼족 토기], 굽다리 접시[고배]도 포함되어 있다. 철기류는 가위와 쇠낫[철겸], 쇠도끼[철부], 손칼[도자] 등이 있으며, 유물의 출토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장신구류는 금동이식(金銅耳飾)[금동으로 만든 귀고리]과 청동이식(靑銅耳飾), 13호분에서 구슬이 출토되었다. 유물의 조합상은 백제계 유물이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부 가야계 유물이 섞여 있다.
순창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토착 세력 집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백제에 복속되었는지, 언제부터 순창군 일대가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백제 때 설치된 행정 치소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순창군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순창군과 인접된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에서도 마한의 묘제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굴식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돌방[석실]은 그 평면 형태가 장방형을 띠고 있으며, 널길[연도]은 길이 50㎝ 내외로 동벽에 잇대어 마련되었다. 돌방의 동벽에 붙은 상태로 최대 복경이 동체부 중앙부에 자리한 짧은 목 항아리가 출토되었는데, 5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를 근거로 한성기 늦은 시기에 순창군 등 섬진강 유역이 백제에 정치적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백제의 웅진 천도와 그에 따른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백제가 정치적인 혼란에 빠지면서 갑자기 대내외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순창군 일대가 한 동안 대가야의 영역에 편입된 것이 아닌가 싶다. 순창군 동계면 현포리와 임실군 구고리에서 늦은 시기의 가야 토기가 출토됨으로써 그 가능성을 증명해 주었다. 이들 가야 토기는 그 상한이 5세기 말엽을 전후한 시기로 밝혀져 큰 관심을 끌었다.
이제까지 섬진강 중류에 속한 순창군 일대가 6세기 전반기 이른 시기까지 대가야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순창군과 그 주변 지역이 6세기 이전에 이미 백제에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암시해 주었다. 그리고 순창군 토착 세력 집단의 성격과 그 발전 과정, 섬진강 유역으로 백제의 진출 과정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앞으로 섬진강 유역 백제계 문화 유적을 대상으로 발굴 조사를 활발하게 실시하여 백제와 가야의 역학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북국 시대]
남북국 시대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고 북쪽에는 발해가 병존한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를 말한다. 670년에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는 신라의 괴뢰 국가인 보덕국(報德國)[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이 서고, 그 이듬해에는 탕정주(湯井州)[충청남도 아산군 아산면 탕정리]와 소부리주(所夫里州)[부여], 또 그 다음해는 완산주(完山州)[전주]가 설치되었다. 그 뒤로도 신라는 계속하여 백제의 옛 영토에 군대를 출동시켜 678년에는 발나주(發羅州)[나주], 680년에는 금관경(金官京)[김해]을 설치하고 684년에는 괴뢰 정부 보덕국마저 해체시킴으로써 백제의 옛 영토 전체를 재편하였다.
신라는 고구려를 포함한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9주(州) 5소경(小京) 제도를 확립하였다. 옛 백제의 땅에는 웅천주(熊川州)[웅주], 완산주, 무진주(武珍州)[무주]의 3개 주가 설치되어, 순창군의 도실군과 역평현은 완산주의 관할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의 모든 지명을 중국식 한자 이름으로 모두 고치고 주-군-현 간의 영속(領屬) 체계를 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제도는 후일 고려의 계수관제(界首官制)와 유사하게 한 개의 주를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의 소경이나 군, 현들을 하나의 행정 군사 단위로 묶은 것으로써 특히 행정력의 강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완산주는 전주로 바뀌고 1주[전주] 1소경[남원] 10군 31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 결과 도실군은 순화군으로, 역평현은 적성현으로 바뀌어 구고현(九皐縣)[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과 함께 순화군의 영현(領縣)이 되어 모두 전주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신라 왕조가 쇠퇴해가는 지배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추진한 중국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통치 강화를 시도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시행한 지 20년 만인 776년(혜공왕 12)에 취소되고 백관의 호가 모두 복구되면서 도실군과 역평현의 이름도 환원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껏 순창군과 인접한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 토기 요지를 제외하면 남북국 시대 순창군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유물도 출토되지 않아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살필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순창군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것이 매장 문화재이다. 매장 문화재는 부족한 문헌 자료로는 읽을 수 없는 수많은 역사 사실들을 보여 준다. 원삼국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에 이르는 매장 문화재를 통하여 그간 소석색국이란 이름만 있었던 순창 지역 삼한 소국에 대한 정보, 삼국시대 마한과 가야와 백제의 관계 등 여러 새로운 사실들을 읽어낼 수 있다. 흔히 역사의 실체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순창군 매장 문화재에 대한 보존 대책을 조속히 수립하고 그 성격을 밝히기 위한 발굴 조사가 추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전혀 유물과 유적이 알려지지 않은 남북국 시대 유적지 발굴이 시급하다 할 수 있다. 향후 순창군의 역사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매장 문화재에 대한 발굴 조사를 활발하게 실시한 뒤, 이를 토대로 선사부터 고대까지 순창군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한 심층적인 연구가 다시 행해져야 할 것이다. 고대는 문헌 자료가 빈약하고, 특히 순창군을 포함한 옛 백제 지역이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