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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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壽墻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수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양병호 |
법정리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수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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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법정리 |
면적 | 440,700㎡ |
가구수 | 95가구 |
인구[남/여] | 184명[남 91명/여 93명]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수장리는 오복 중 으뜸이라는 ‘목숨 수(壽)’ 자에 마을이 담장 형국이라 하여 ‘장(墻)’ 자를 붙여 수장리(壽墻里)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동계면 소재지에서 5㎞ 지점의 남원군 대강면과 경계를 이루는 풍악산 영봉의 계곡에 위치해 영계(靈溪)라 부르던 것을 남원 고을 영계방(靈溪坊)의 바깥 영계라 하여 외령(外靈溪)라 불렀다[강촌, 내령을 안령계[內靈溪] 상외령, 하외령을 밖영계[外靈溪]라 불렀음]. 1972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외령리를 상외령(上外靈)과 하외령(下外靈)으로 분리 개칭하였다. 상외령에는 임진왜란 때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파주에서 피난 와 터를 잡고 약 4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하외령 마을은 양촌, 음촌 2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장 마을에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필방(李必芳)이 순조(純祖) 때 적성면 괴정에서 와 선산 아래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 가작 마을의 옛 이름은 소고촌(小孤村)으로, 선인(仙人)이 바둑을 관람하다가 짚고 있던 지팡이가 썩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자연 환경]
동계면 소재지에서 신촌교를 지나 동계천을 따라 2㎞ 정도 올라가면 수장 마을이 나온다. 풍악산 준령으로 이어진 조그마한 산줄기에 마을 터가 이루어져 마을이 숯다리미 형국으로 되어 있다. 하늘에서 보면 풍악산을 달리던 말에서 말안장이 떨어져 있는 말안장 터 형국으로도 본다. 한편 화재를 막기 위해 마을 중앙에 인공 호수를 만들어 물을 가두었다는 설이 있다. 그때 만들었던 방죽 터가 남아 있다. 마을 앞산에는 태봉이라는 봉우리가 있는데,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암산(高巖山)에서 흐르는 물과 연직동에서 흐르는 물이 합수된 지점 아래에 미역 바위가 있다. 미역같이 미끄럽게 생긴 바위라고 해서 미역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을 뒤에 산수통이라는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다.
[현황]
수장리는 상외령(上外靈) 마을, 하외령(下外靈) 마을, 수장(壽墻) 마을, 가작(哥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2021년 12월 현재 상외령 마을 면적은 27만 7,700㎡로 농경지 5만 1,700㎡, 임야 22만 6,000㎡이며, 인구는 36가구, 69명으로 남자가 35명, 여자가 34명이다. 하외령 마을 면적은 5만 6,500㎡로 농경지 2만 1,500㎡, 임야 3만 5,000㎡이며, 인구는 19가구, 36명으로 남자가 21명, 여자가 15명이다. 수장 마을 면적은 5만 9,000㎡로 농경지 2만 8,000㎡, 임야 3만 1,000㎡이며, 인구는 21가구, 39명으로 남자가 19명, 여자가 20명이다. 가작 마을 면적은 4만 7,500㎡로 농경지 2만 4,500㎡, 임야 2만 3,000㎡이며, 인구는 19가구, 40명으로 남자가 16명, 여자가 24명이다.
예전에는 외령리 앞길을 통하여 제비 고개[연치(燕峙)]와 솔고재를 거쳐 오수와 전주를 갈 수 있었고, 구재[구등치(拘嶝峙)], 고바위재[고암봉(高巖峰)]를 넘어 남원과 곡성을 오갔다. 오늘날에는 동계면 소재지에서 남원 시내버스가 운행하고 교량으로는 신촌교, 가작교, 하외령교, 대복교가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 창건한 난계사(欄溪寺) 터에는 축대가 남아 있다. 보물·철불·봉불·석불 등은 남원 선원사로 옮겨 가고 절터만 있다. 하외령 마을은 30년 전에는 40여 가구, 200여 명이 거주하였으나 인구가 감소하면서 1993년 영동 초등학교도 폐쇄되어 개인 휴양지로 이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