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50
한자 崔恒慶
영어공식명칭 Choe Hanggyeong
이칭/별칭 덕구(德久),죽헌(竹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0년연표보기 - 최항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7년 - 최항경 한강 정구에게 수학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최항경 진사시에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22년 - 최항경 회연서원 초대 원장에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38년연표보기 - 최항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78년 - 최항경 통훈대부 제용감 정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729년 - 최항경 운암사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782년 - 최항경 오암서원에 배향
출생지 최항경 출생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거주|이주지 최항경 이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 지도보기
수학|강학지 최항경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지도보기
묘소|단소 최항경 묘소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나정 2리
사당|배향지 오암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영천
대표 관직|경력 회연서원 초대 원장

[정의]

조선 후기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영천 최씨 입향조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 증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 최유(崔裕)이며, 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최사철(崔師哲)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최정(崔淨)[1528~?]이고, 어머니는 연창군(延昌君) 이학수(李鶴壽)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부인은 풍산 류씨(豐山柳氏) 참봉(參奉) 류경준(柳景濬)의 딸이다. 관봉(鸛峰)최은(崔𨏈))[1583~1656], 매와(梅窩)최린(崔轔)[1597~1644] 형제가 아들들이다.

[활동 사항]

최항경(崔恒慶)[1560~1638]은 1560년(명종 15) 경기도 고양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5년(선조 8)에 선대의 묘소를 살피려는 아버지를 따라 성주 지역으로 오게 되었는데, 성주에서 아버지가 별세하자 어머니를 모시면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상기(喪期)를 마친 1577년(선조 10)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연(檜淵)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에게 하직 인사를 하던 중, 정구의 권유로 성주에 남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쓴 격문(檄文)을 보고 바로 적에게 달려가려 하였으나, 홀로 된 어머니가 연로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였으며, 대신 시를 읊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1617년(광해군 9)에 스승인 정구가 고을 사람에게 무함(誣陷)을 당하자, 정구의 여러 문인이 상소문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이때 최항경은 소두(疏頭)[여러 명이 상소를 올릴 때 제일 먼저 이름을 적는 대표자]로 추대되었지만, 서울에 이르기 전에 등에 종기가 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1620년(광해군 12) 정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심상(心喪)[상복은 입지 않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하는 일] 3년을 행하였다.

또한 1622년(광해군 14) 정구를 배향하기 위해 회연서원이 세워지자, 서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77세의 고령이었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두 아들을 고령(高靈)의 의병소(義兵所)로 나아가게 했으나, 얼마 후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북쪽을 향해 통곡한 뒤 통분시(痛憤詩)를 남겼다. 이후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1638년(인조 16)에 생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저술]

최항경은 1577년(선조 10)에 한강 정구의 권유로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날로 학문이 진보하여 1605년(선조 38)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더 이상 과거 공부에 얽매이지 않았고, 대신 오암(鰲巖)에 집을 짓고서 위기지학(爲己之學)[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공부]에 전념하였다. 스승 정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니, 누군가가 정구에게 사문(斯文)과 관련된 일을 이야기하면, 정구는 매번 최항경과 함께 상의를 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최항경은 예학에 대한 식견이 특히 높았는데, 정구 역시 예서(禮書)를 편찬할 때면 반드시 그에게 글을 보내 교감(校勘)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또한 기존의 예서가 지나치게 번잡한 것을 병통으로 여겨 여러 사람의 의견을 한데 모아 분류한 뒤 책으로 만들어 열람하기 편하도록 고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스승의 영향으로 심학(心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자경잠(自警箴)』을 지어서 마음을 붙잡아 잠시라도 놓아 버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 뒤,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던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많은 저술들을 남겼으나 대부분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와 후손들이 남은 글들을 수합하여 『죽헌선생문집(竹軒先生文集)』 4권 2책을 간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나정 2리에 있으며, 아들들인 최은최린의 묘소도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1729년(영조 5)에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고, 1782년(정조 6)에는 아들들인 최은·최린과 함께 오암서원(鰲巖書院)[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에 배향되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이 묘도비명(墓道碑銘)을 찬하였다. 또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유허비명(遺墟碑銘)을 작성했고, 후손인 해암(海菴) 최영록(崔永祿)[1793~1871]이 행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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