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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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浣亭先生文集 |
이칭/별칭 | 『완정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미진 |
간행 시기/일시 | 1815년 - 『완정선생문집』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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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전적|고문헌|시문집 |
저자 | 이언영(李彦英) |
권책 | 8권 4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30.3×21.0㎝ |
어미 |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권수제 | 완정선생문집(浣亭先生文集) |
판심제 | 완정선생집(浣亭先生集) |
[정의]
1815년 간행된 성주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 후기 문인 이언영의 시문집.
[저자]
이언영(李彦英)[1568~1639]의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공조좌랑 이등림(李鄧林)의 아들이다. 한강 정구(鄭逑)와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인(門人)으로 1591년에 생원이 되고, 1603년에 식년 문과 장원을 하여 성균관 정육품 벼슬인 전적이 되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재직 시 영창대군의 억울한 죽음을 항의한 정온(鄭蘊)을 변호하다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인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인조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성균관 직강, 사예(司藝), 내자시정(內資寺正),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1625년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다. 만년에 낙동강 가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편찬/간행 경위]
서문 및 발문이 수록되지 않아 자세한 발간 경위를 알 수 없으나, 저자의 6세손 이횡(李鈜)[1752~1827]과 이건(李鍵)[1763~1815]이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문집 초고본을 바탕으로 수습 및 편찬하여 1803년에 최흥벽(崔興璧)[1739~1812]이 글을 다듬어서 고치고, 1815년에 김굉(金㙆)[1739~1816]의 교정을 받아 순조 연간에 목판으로 『완정선생문집(浣亭先生文集)』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형태/서지]
8권 4책의 목판본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크기는 30×21㎝이며, 어미는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권수제는 ‘완정선생문집(浣亭先生文集)’이고 판심제는 ‘완정선생집(浣亭先生集)’이다.
[구성/내용]
권1에는 시(詩) 65편과 만시(挽詩) 33편이 구분 수록되어 있으며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2는 이상길(李尙吉), 박광선(朴光先), 장현광(張顯光) 등과 주고 받은 서(書) 21편, 사직소 3편, 그 외 정사(呈辭) 2편, 계(啓) 3편, 장계(狀啓) 2편 등이 있다. 권3은 선대의 유적, 지인들의 일화, 정묘호란 때의 사건, 저자 본인의 행적을 기록한 잡저 형식의 운계한화(雲溪閒話)가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권4는 설(說) 2편[種西爪說/自警說], 논(論) 7편[主櫓者棄去論/劉更生獻鴻寶秘書論/漢高祖不賞三老董公論/唐太宗賜太子帝範十二篇論/秦始皇有天下論/卓茂不治亭長論/前席問鬼神論], 전책(殿策) 1편[問安危治亂會試魁]이 수록되어 있다.
권5는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박성(朴惺) 등등에 대한 제문(祭文) 13편과 축문(祝文) 1편, 기우문(祈雨文) 1편, 묘지(墓誌) 1편[通訓大夫宗薄寺正龍溪宋公墓誌銘], 묘갈(墓碣) 2편[通政大夫行樂安郡守禹公墓碣/先考朝散大夫工曺佐郞府君墓碣], 장록(狀錄) 4편[通德郞行軍資監參奉臥溪成公狀錄/聘君通訓大夫宗薄寺正竹齋郭公狀錄/始祖將軍公狀錄/先祖山花先生狀錄], 유사(遺事) 1편[先妣令人崔氏遺事]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6은 저자에 대한 연보이다. 권7은 부록으로, 저자의 아들 이창진(李昌鎭)이 작성한 행장(行狀), 조경(趙絅)이 지은 묘갈명(墓碣銘), 이민구(李敏求)와 이도장(李道長)이 지은 묘지명(墓誌銘), 김굉(金㙆)이 지은 유허비명(遺墟碑銘), 최흥벽(崔興璧)이 지은 유사(遺事)가 있다. 권8 역시 부록으로, 제문 12편, 만사 4편, 정구와 장현광의 서독(書牘) 3편과 허목(許穆)이 1665년에 작성한 「완석정기(浣石亭記)」 및 민형남(閔馨男) 외 6인이 지은 「완석정제영(浣石亭題詠)」이 있다.
[의의와 평가]
『완정선생문집』에서 저자가 스승 한강 정구와 상례(喪禮)에 대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거나 여헌 장현광을 비롯해 상촌(象村) 신흠(申欽), 석담 이윤우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교유하는 등 영남 지역 인사들과의 교류 장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산림에 은거하면서 은자로서의 풍모를 드러내었는데, 특히 만년에 성주 지역에 거주하며 성주 사림을 대표하여 지역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백성들의 고충을 함께 했던 저자의 삶을 여실히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