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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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陽里 |
영어공식명칭 | Bongyang-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봉양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규택 |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원래는 배야건[소건방]이라 불렀던 곳으로 1845년(헌종 11) 성주목사 김횡(金鑅)[1784~1847]이 ‘봉양(鳳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봉양1리의 자연 마을로 새묵[새목·봉항(鳳項)], 안계(安溪)[개울선불·계선불(溪仙佛)], 먹들[흑평(黑坪)]이 있고, 봉양2리의 자연 마을로 상선불(上仙佛), 백양골[백양곡(栢陽谷)], 큰밭골[대전곡(大田谷)]이 있다.
봉양리 자연 마을 대부분은 조선 시대 때 다양한 성씨가 거주하면서 형성되어 변화하여 왔다. 안계는 1715년(숙종 41)께 조성된 마을이며, 당시 주변에 편히 누울 수 있는 큰 바위가 있어 ‘안계’라고 하였다가 이후 마을 옆으로 물길이 지나가고 뒤편에 절터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개울선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먹들은 1880년(고종 17)쯤 제(諸) 씨 성의 선비 일가가 입향하여 일군 마을인데, 당시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헤치자 검은 암석이 나오므로 자리를 옮겨 팠으나 검은 돌이 계속 나왔다. 그렇게 파낸 검은 돌이 길게 나열되어 있는 마을이라고 ‘먹들’이라고 불렀다. 상선불은 조선 정조(正祖) 때 성주 도씨(星州都氏)가 거주하면서 형성된 마을로, 당시는 ‘번계’라고 부르다가 이후 상선불로 고쳤으며 현재는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후기까지 청파방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관제 개혁 때 현재의 군 명칭인 성주군(星州郡)으로 확정하고 방(坊)을 면(面)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봉양동으로 하고 청파면의 법정동으로 편제하였다. 1934년 청파면과 지사면을 수륜면으로 합면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1076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정하여 수륜면 봉양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서북쪽과 동쪽에 300~500m의 산지가 둘러싸고 있고, 대가천의 지류 주변 평탄한 지역에 자연 마을들이 자리한다. 새묵 뒤편 성주군 가천면과의 경계에 산고개와 가무리재 등이 있다. 가야산 정동쪽 산곡(山谷) 및 그 구릉과 계곡을 차지하면서 서쪽으로 가야산 산봉우리를 포함하고 있다. 봉양리 서편 가야산의 광범위한 골짜기인 태평동(太平洞)은 가야산의 4절(絶)의 하나이다. 연감산(硯坎山)은 봉양리 새목 동쪽, 수륜면 수성리 가람 마을의 남서쪽, 가천면 동원리 음촌 마을의 동남쪽 면계(面界)에 걸친 산으로, 산봉우리의 형상이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는 갓을 쓴 노인처럼 생겼다고 하여 노인봉이라고도 부른다. 박달산(朴達山)은 백양골 동쪽, 수륜면 신정리 새덤 마을 서남쪽에 걸쳐져 있다. 새묵과 가천면 동원리로 나드는 산고개를 샘목 고개라고 부르고, 상선불 위쪽 태평동(太平洞) 산골에서 용기골로 나드는 산고개는 중나들이 고개라고 부른다.
신당천은 가야산에서 발원하여 봉양리 개울선불을 거쳐 먹들 마을 아래에서 새목천과 합하고, 적송리 학동 마을을 거쳐 새주막 마을에서 오인동천과 합하며, 수륜면의 면소재지인 신파리에서 범골천, 천방천과 합하면서 수륜리 덕촌 마을에서 대가천으로 들어가는 소하천이다.
[현황]
봉양리는 수륜면의 서쪽에 자리하여 북동부와 동부, 남부는 수륜면의 수성리, 신정리, 적송리, 신파리, 서부와 북부는 성주군 가천면과 접한다. 2021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7.62㎢이며, 봉양1리와 봉양2리 2개 행정리에 135가구, 212명[남 110명, 여 10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봉양리의 인구는 1974년 695명에서 1984년 393명, 1994년 217명, 2001년 159명, 2010년 147명으로 감소하다가 2018년 205명, 2021년 212명으로 다소 증가하였다. 가구 수는 1974년 122가구에서 1984년 93가구, 2001년 63가구로 감소하였지만 이후 증가하여 2018년 119가구, 2021년 135가구가 되었다.
문화 유적으로 판윤 박가권 유지(判尹朴可權遺趾)가 있는데, 고려 후기 개성판윤을 지낸 박가권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입장을 견지한 채 이곳으로 와서 은거한 자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