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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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靈谷里銀杏- |
영어공식명칭 | Yeonggokri Ginkg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57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광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곡리 평산신씨 중시조 한림학사 신준미(申遵美)가 심은 은행나무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영곡리 은행나무」는 조선 시대 평산신씨 중시조 신준미가 난세가 되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연못가 양쪽에 나무를 심었다고 전하여 오는 거목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7년 금남향토지발간위원회에서 발간한 『금남면향토지』에 수록되어 있다. 1994년 임영수가 수집하였다.
[내용]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 신준미가 난세를 피해서 관직을 버리고 금남면 영곡리로 낙향하였다. 조정에서 전직(典籍)으로 복귀하기를 간청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였다고 한다. 평산신씨가 입향(入鄕)하기 전에는 이 지역을 병암골이라고 불렀는데 평산신씨가 한양에서 왔다고 하여 한양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신준미가 350년 전 영곡리 병암사서 터[현재 평산신씨 재실] 앞 연못가 양쪽에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6·25전쟁 때 폭탄을 맞고 가지가 찢어졌는데 이틀 동안 구렁이 울음소리를 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모티프 분석]
「영곡리 은행나무」의 주요 모티프는 ‘평산신씨의 영곡리 입향’이다. 금남면 영곡리는 세종특별자치시가 되기 전 연기군 시절에는 오지(澳地)에 속하였다. 따라서 기묘사화 등 난세가 되면 많은 선비가 낙향하여 은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곡리의 평산신씨는 그 계보를 전하고 있다. 은둔하면서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정착할 것이라는 은유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