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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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南文節祠 |
이칭/별칭 | 매죽헌사우,충신 성삼문 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문절사길 55-7[달전리 330-5]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안경희 |
건립 시기/일시 | 1903년 - 금남 문절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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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7년 - 금남 문절사 개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4년 - 금남 문절사 개축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매죽헌사우[문절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2년 7월 1일 - 매죽헌사우[문절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지정 해지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12월 31일 - 금남 문절사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1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금남 문절사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금남 문절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문절사길 55-7[달전리 330-5] |
원소재지 | 문절사 -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 330-5 |
성격 | 건물 |
양식 | 전퇴식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성하보 |
관리자 | 성하보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에 있는 성삼문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사당.
[개설]
문절사(文節祠)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1418~1456]을 제향하기 위하여 지어진 사당이다. 공식 명칭은 ‘매죽헌사우(梅竹軒祠宇)’이다.
성삼문의 정려인 문절사가 금남면 달전리에 세워진 때는 1903년으로, 사실 달전리는 성삼문이 출생하였거나 생전에 머문 적이 없는 곳이다.
이러한 곳에 성삼문의 정려가 세워진 것은 달전리에 세거한 창녕성씨(昌寧成氏)들의 사족 활동 때문으로, 성삼문 추모 및 추숭 활동에서 가장 후대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1438년(세종 20)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후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명나라에 가서 음운(音韻)[한자의 음(音)과 운(韻)을 아울러 이르는 말]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하여 1446년(세종 28) 10월 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이후 박팽년, 허조 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계획하다 실패하여,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능지처사(陵遲處死)[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를 당하였다.
후대에 사육신의 충절이 재평가되면서 성삼문의 유허(遺墟)[오랜 세월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옛터]가 남아 있는 곳곳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다.
그러던 중 1902년(광무 6) 성삼문의 15대 방손(傍孫)[시조는 같지만 직계에서 갈라져 나간 방계(傍系) 혈족의 자손] 성기운(成璣運)[1847~1924]이 명정 상소를 올려 성삼문의 충신명정을 받게 되었고, 바로 이듬해인 1903년(광무 7) 방손 성주영(成周英)이 봉사손(奉祀孫)[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으로 결정되면서 달전리에 단사를 세우고 봉사하도록 하여 문절사가 건립되었다.
[위치]
문절사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마을의 닭재 아래에 있다.
정면으로 달전리의 안산(案山)[풍수지리에서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이 보인다.
[변천]
1902년에 성삼문의 방손 성기운이 명정 상소를 올려 충신명정을 받고 이듬해에 방손 성주영이 봉사손으로 결정되면서 달전리에 단사를 세워 문절사를 건립하였다.
1967년에 5칸 사우로 개축하였고, 1984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형태]
문절사는 삼문과 사우로 구성되어 있다. 삼문의 중앙에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내려진 충신정문이 걸려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 전퇴식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동향하고 있다.
문절사 내부에는 중앙에 영정을 모시고 영정 오른쪽에 ‘충의(忠義)’, 왼쪽에 ‘정심(正心)’이라 쓰인 족자를 내걸었다. 영정 앞에는 촛대와 향로를 놓아 두었다.
위패는 종가 집안에서 따로 모신다. 영정은 성삼문 사후 500년 후에 그린 것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얼굴을 토대로 그렸다.
한편 삼문의 중앙에 걸린 명정현판에는 ‘충신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정대부 승정원우부승지 시충문공 성상문지려 광무칠년계묘사월일(忠臣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訓大夫 承政院右副承旨 諡忠文公 成三問之閭 光武七年癸卯四月日)’이라 새겨져 있다.
[현황]
문절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7월 1일 해지되고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로 다시 재지정되었다.
제향은 매년 음력 6월 6일 올리고 있다.
한때 유림에서 성삼문이 집현전 학자이던 점을 감안하여 한글날인 10월 9일 제향하기도 하였지만 여러 형편에 따라 음력 6월 6일에 제향하고 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文節祠’라는 현판을 친필로 썼으며, 도와 군의 보조로 개축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