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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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烏金簪祭-端午風俗 |
영어공식명칭 | Ogeumjamje and Dano Festival |
이칭/별칭 | 오금잠굿,오금잠놀이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집필자 | 김도현 |
[정의]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 호장(戶長)이 주도하여 단오 전 사흘 동안 오금잠을 신체로 모셔서 연행하는 마을굿.
[개설]
강원도 삼척 지역에서의 단오 전통은 조선시대 기록에 잘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오금잠(烏金簪)을 작은 함에 담아 관아(官衙) 동쪽 모퉁이 나무 아래에 감추었다가 단오날이면 끄집어내 제물을 갖추어서 제사하는 오금잠제를 비롯하여 미로면과 근덕면 궁촌리 선흥 마을굿 등 큰 마을을 중심으로 단오굿이 연행된 마을이 매우 많았다. 이와 함께 태백산 자락에 있는 마을들과 하장, 미로, 근덕 지역 중심의 마을 단위로 마을 서낭당에서 서낭고사를 지낸 후 마을 주민들이 모여 단오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그네를 타고 마을 잔치를 하는 등 단오를 즐긴 사례 또한 매우 많다.
[관련 문헌 검토]
삼척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 풍속조에 “… 오금잠(烏金簪)에 제(祭)한다.…”라고 기재된 이후 이와 관련하여 직접 목격한 사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오금잠제’와 관련하여 현재 전하는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삼척도호부 풍속조
무당과 귀신을 믿는다. 사람의 성품이 대체로 교서낭하다. 오금잠(烏金簪)에 제(祭)한다. 고을 사람이 잠(簪)을 작은 함에 담아 관아 동쪽 모퉁이 나무 아래에 감추었다가 단오날이면 끄집어내 제물을 갖추어서 제사한 다음 이튿날 도로 감춘다. 전해오는 말에는 고려태조 때 물건이라 하지만 제사 지내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일이어서 관에서도 금하지 않는다.
2.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 부사(府使) 김효원(金孝元) 통훈
1575년(선조 8) 을해년 12월에 왔다.[선조실록에는 10월 25일 부사로 임명됨.] 본부에는 옛날부터 오금잠이 있었는데 요기(妖氣)를 일으켜 재앙을 만든다고 하여 온 고을 백성들이 복을 빌었을 뿐만 아니라 혼례가 있는 집에서는 마지못하여 아름다운 비단으로 용을 만들어 그것에 입혀야만 하였다. 그 모양은 매우 컸다. 공이 부임한 후 그것을 끌어내어 불태우고는 손수 성황(城隍) 위판(位版)을 써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부터 온 고을이 편안해졌다.
사직(社稷) 및 각종 제사에 쓰이는 위판이 흩어져 있어서 공손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당을 지어 봉안하니 상하 모든 사람이 편안해졌다. …
3. 김종언(金宗彦)의『척주지(陟州誌)』 매곡리조(邁谷里條)
공은 삼척에 부임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 폐단을 제거함을 제일의 업무로 삼았다. 읍에 금잠[금비녀] 한 개가 있었는데 신라시대부터 전하는 것으로, 백겹으로 싸서 성황에 두고 그곳 사람들이 신봉함이 신명과 같았다. 무릇 마을의 대소사에는 반드시 먼저 고한 뒤에 행하였다. 그러므로 무격(巫覡)이 날로 기승을 부려서 완구(宛丘)의 습속과 같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세상을 미혹함이 매우 심하여 폐단을 고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공이 개연히 없애려는 뜻을 품고 좋은 날을 택하여 제물을 갖추어서 선비 가운데 강한 사람 몇 명을 불렀다. 공은 몸소 음사(淫祀)에 가서 비녀를 깨부수고 불에 던지었다. 모든 향의 소장들이 급히 모여들어서 놀라 하며 이것이 공에게 어떤 화복을 줄 지를 논하며 동요하였다. 공은 의연히 동요하지 않고 당우(堂宇)를 청소한 다음 성황의 위패를 그 속에 써 놓았다. 의관을 정제한 다음 친히 제사 지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움츠리며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4. 『남명선생별집(南冥先生別集)』 김성암 유사(金省庵 遺事)
공은 삼척에 부임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 폐단을 제거함을 제일의 업무로 삼았다. 읍에 금잠[금비녀] 한 개가 있었는데 신라시대부터 전하는 것으로, 백겹으로 싸서 성황에 두고 그곳 사람들이 신봉함이 신명과 같았다. 무릇 마을의 대소사에는 반드시 먼저 고한 뒤에 행하였다. 그러므로 무격(巫覡)이 날로 기승을 부려서 완구(宛丘)의 습속과 같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세상을 미혹함이 매우 심하여 폐단을 고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공이 개연히 없애려는 뜻을 품고 좋은 날을 택하여 제물을 갖추어서 선비 가운데 강한 사람 몇 명을 불렀다. 공은 몸소 음사(淫祀)에 가서 비녀를 깨부수고 불에 던지었다. 모든 향의 소장들이 급히 모여들어서 놀라 하며 이것이 공에게 어떤 화복을 줄 지를 논하며 동요하였다. 공은 의연히 동요하지 않고 당우(堂宇)를 청소한 다음 성황의 위패를 그 속에 써 놓았다. 의관을 정제한 다음 친히 제사 지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움츠리며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삼척은 산맥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매우 황벽하고, 습속은 귀신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소박하여 다스리기 어려웠다. 공은 옛 제도를 일신하고, 부세와 요역도 정식으로 하였다. 가르칠 만한 자질 있는 선비를 가리어서 시례(詩禮)를 가르치고 닦고 반성하게 하니 모두 크게 바뀌지 않음이 없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헌이라 칭한다. 혼례와 상사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고 이민(吏民)이 윗사람을 친히 하고 부리기 쉽게 됨은 대개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5. 허목(許穆)의 『척주지(陟州誌)』매곡리 성황사
성황사는 처음에 갈야산에 있었으나 나중에 성안으로 옮겼다. 무격들이 사당에 목상을 만들어 놓고서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빌고 하였지만 재앙을 초래할까 두려워 금하지 않다가 1654년(효종 5) 갑오년에 부사 이지온이 그 목상을 없애 버렸다. 지금은 그 사당에 여러 사당의 사판(祀板)을 보관하고 있다.
6. 허목(許穆)의 『척주지(陟州誌)』 매곡리조 오금잠제
옛날에 오금잠이 있어 풍속에 그 귀신을 믿었는데 혹 고려태조의 유물이라고 하니 거의 1000년 가까이 왕신으로 그것을 제사 지낸 셈이다. 4월 초 하루부터 재계하고 오금잠 신에게 제사 지내기 시작하여 단오까지 지냈다. 단오 전 사흘 동안은 곧 대사 3일이라 하여 큰제사를 지냈다.
1653년(효종 4) 계사년에 부사 정언황(丁彦璜)이 그 제사를 금지하였다. 지금 오금잠은 석실에 폐쇄되어 있으며, 그곳을 사랑당(社郞堂)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오금잠은 임진왜란 때 잃었으니 지금 폐쇄되어 있는 오금잠은 옛날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7. 허목의 『미수기언(眉叟記言)』
오금잠은 오래되어 대개 그 처음을 모른다. 매년 5월 5일 무당을 모아 사흘 동안 크게 제사 지낸다. 호장(戶長)이 이를 주관하고 있는 가운데 반드시 먼저 부정한 것을 모두 금한 후 제사 지낸다. 나그네는 재우지 않으며, 사람이 죽어도 곡을 하지 않는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여러 명이다. 다투어 재산을 바쳐야 복을 받는다고 여긴다. 공경치 않으면 재앙과 원수가 집에 일어난다고 하여 두려워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관아에서 금하지 못하였는데 부사 정언황이 그 제사를 금하고 석실에다 잠을 가두었다고 하였다.
8. 채제공(蔡濟恭)의『번암집(樊巖集)』삼척 오금잠가
오금잠은 고려 때부터 전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네
삼척 사람들이 이를 높이어 신으로 제사 하누나
총사(叢祠)는 고성(古城)의 뒤에 있는데도
매년 5월 5일 잠신이 나오면 다투어 먼저 보려고 하누나
늙은 무당은 고운 무늬 옷 입고 앞에서 이끌며
큰 부채 펼쳐 들고 나풀나풀 춤추는데
삼척부 안의 수백 호가
한 사람이라도 몸을 엎드리지 않는 자가 없구나.
생소(笙簫) 소리는 슬피 울리다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네
잠은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무당이 대신 전하는데
너의 집 식구가 무릇 몇 명인가
상서러움을 만나고 재액이 내림은 모두 나의 권한이로다 하니
우매한 백성은 무릎을 꿇고 바침에 아까운 바가 없어
지포(紙布)·미속(米粟)·금전(金錢)이 쌓이는구나.
오호라! 오금잠은 사람에게서 두터운 베풂을 받았는데 장차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황궁(皇穹)은 위에 있으며, 신들이 줄을 지어 내려왔다.
아마도 너의 심사는 자유롭기 어렵구나
병자는 나아지기를 구하고 빈자는 부를 구하는데
네가 책임지고 불쌍히 여길 것이 많으니 나는 이 때문에 걱정이로다
잠이여 잠이여
총사(叢祠)의 신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몸을 도랑과 골짜기에 맡기려 하여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누나
삼가 어리고 어리석음을 배우지 못하고 소인이 외람되이 중대한 임무를 위임받아 인민을 저버리고 고기만 먹을 뿐이로다.
위의 자료를 보면 삼척 성황사 내에 민간에서 모시던 신상이 목상과 오금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월을 비롯하여 성황사 내에 무격들이 목상을 비롯한 신상을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낸 예가 전국에서 많이 발견되었지만 삼척과 같이 그 대상물이 2개인 예는 거의 없다.
그리고 목상이나 오금잠을 철거하거나 제사를 금하는 등 미신을 혁파하고 유교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부사 김효원, 정언황, 이지온이 목상 대신 위판을 설치한 것을 보면 지방관들이 성황신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성황사를 관리하는 방법을 국가 예제에 기초하여 바꾸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자료 5. 허목의 『척주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성황사 내에 무격들이 목상을 만들어 모셨다가 효종 5년에 부사 이지온이 없앤 이후 등장하지 않지만 오금잠은 조선 이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부사 정언황과 김효원 등이 계속 폐하고 없앴지만 이들 부사가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없어지지 않고 삼척 사람들에게 계속 신봉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 삼척에 파견된 부사들이 서낭당의 미신을 혁파하고 유교 질서를 확립하겠다는 목적과 함께 무당의 민폐 제거, 세금 징수라는 측면에서 없앴지만 민간에서는 계속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음사금단(淫祀禁斷)을 통해 민폐를 제거하고 지역민 통제를 강화하려는 측면과 오금잠제가 당시 삼척 지역에서 삼척 지역 호장이 주도하는 고을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풍요와 안정이라는 염원을 대변한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는 오금잠제를 비롯하여 지방에서 행해진 제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삼척 읍치성황사와 오금잠제]
삼척 지역 호장이 주도한 오금잠제를 삼척 읍치 성황사 운영에서 풍요와 안정이라는 현재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군·현별로 설치된 성황사의 형성 배경과 다양한 전개 과정의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삼척에서 행해진 오금잠제에서 주목하여야 할 요소는 지방 향리나 지역 주민들이 이에 적극 동참하고 있으며, 단오를 전후하여 제사를 지내고 신상(神像)을 받든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 사례를 찾아 비교하면 민간에서 행해진 제의 양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성황신을 보면 성황신의 성격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자세하게 분류하면 인간 기원신[김인훈: 양산군, 김홍술: 의성현, 신숭겸: 곡성현 등], 전통 산신[계변천신: 울산군, 정성대왕신: 현풍현], 동물신[차귀당: 대정현], 주물(呪物)을 모신 사례[팔령신: 영해, 오금잠: 삼척], 낭천현의 자모당[모당(母堂)과 자당(子堂)]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에 따라서 삼척 성황사에서 오금잠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성황신의 모습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여야 하며, 국가에서 읍치 성황사를 공식 설치하기 전에 이미 이 지방에서의 전통 신앙 관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국가에 의한 음사금단 조치로 말미암아 이들 신앙 관념이 공식 인정되지 않아서 비공식으로 향리와 지역민 등에 의해 매년 제사가 거행되었고, 폐단이 심하여 결국 지방관들이 이를 금하는 조치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삼척 지역에서 오금잠제를 단오에 지낸 가운데 지방 향리들에 의해 단오에 신상을 세우고 제의(祭儀)가 거행된 예를 강원도 내에서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즉 강릉의 국사성황제 가운데 신을 성황사에 모심과 치제(致祭), 양구에서 성황신 모심, 영월에서 목우인(木偶人)을 제당에 설치하고 해마다 단오에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갖추어 무당으로 하여금 제의를 주도하게 한 사례, 양양의 성황사에서 매년 무격이 한 해의 무사함을 위해 신사(神祀)를 한 사례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전통이 현재 삼척 지역에서는 사라졌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 삼척의 읍치 성황사[현재 성북동 성황당]에서 단오에 굿을 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와 같은 민간에서의 오금잠제를 비롯한 무격에 의한 제사는 국가 의지나 정책과 상관없이 각 지역 나름의 전통이 지방에서 계속 유지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금잠제의 지속과 변동]
오금잠제는 1993년 오금잠놀이로 재현되었다. 과정은 오금잠제 모시기[제례]-오금잠신굿[축원]-놀이굿[제수나눠먹기]-뒷풀이[화합]로 구성되었다. 단오에 굿을 한 전통은 현재 삼척 읍치 성황사에서 연행되는 오금잠굿과 함께 삼척 시내에서 서쪽으로 8㎞ 떨어진 미로면 골말에서 주도하는 미로 단오굿, 근덕 선흥굿, 초곡마을에서의 단오굿은 이 지역 단오 문화 전통의 흔적을 잘 보여 준다. 이 가운데 미로 단오굿은 단오와 같은 세시일에 신령을 맞이하여 마을 사람이 어울려서 제의와 놀이를 동시에 연행하는 것이다. 소박한 단오 마을굿 원초의 모습을 보인다.
[오금잠제의 성격]
매년 단오 즈음에 삼척 읍치 성황사에서 여성신령으로 상징되는 오금잠신을 모셔서 호장이 주도하는 오금잠제를 연행하였다는 사실은 이 지역 단오 문화 전통의 역사성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삼척 지역 사람들이 단오 즈음에 오금잠굿이 연행되는 읍치 성황사에 개설된 굿당에 모여 삼척 지역의 안녕과 상업·농업의 풍요 추구, 개인들이 소원 성취하길 기원하는 개별 신앙 요소들이 모두 어우러진 오금잠제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삼척부사가 금하여도 향리들이 주도하여 오금잠제가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지역 내에서 나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오금잠제를 설행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민 입장에서는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은 시대였기 때문에 오금잠을 모신 제당에 각종 물건을 바치고 무당의 공수를 받았다는 사실은 채제공을 비롯하여 이곳을 다녀간 많은 이가 소개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내륙의 단오굿이나 해안 지역의 별신굿을 하는 현장에서 무녀가 주민 개개인들의 1년 운세를 짚어 보고, 소지를 올려 주며, 액살을 풀어야겠다고 공수를 내려 주면 굿 말미에 액막음[용왕제]을 지낸다는 점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