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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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家神信仰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집필자 | 김진호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집안에 위치하는 신적 존재를 믿는 의례 행위.
[개설]
가신 신앙은 가정의 안녕과 화목을 기원하기 위해 부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집안 곳곳에 신을 모셔 놓고 섬기는 행위이다. 가신 신앙은 가정 단위의 신앙이지만, 유교적인 제례와는 전혀 갈래가 다르다. 성격상으로 유교 제례는 남성들이 주가 되고 형식성·이념성·논리성 등의 특징을 지니는 데 비해서, 가신 신앙은 부인들이 주가 되며 소박하고 현실적이며 정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가신 신앙은 무속이나 동제(洞祭) 등과 같이 원초 이래로 점차 자연적으로 발생해서 전승되어 온 민간 신앙의 한 갈래이다. 이러한 민간 신앙은 기성 종교들과는 달라서 교주나 창시자가 없고, 교리나 경전·교단 조직들이 희박하며, 각별한 윤리관의 강조도 적고, 논리적인 구분 의식도 많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가신 신앙은 민간 신앙 중에서도 그런 성격을 가장 많이 띠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민간 신앙의 신관(神觀)은 흔히 다신 다령교적(多神多靈敎的)인 성격을 띠는데, 이것은 가신 신앙과 무속 신앙, 그리고 동제를 비롯한 마을 신앙이 모두 기본 성격으로 공유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혼합되어서 구분이 어렵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를테면 주요한 가신인 조상신이나 성주·터주 등은 그대로 그것이 굿의 주요한 제차인 조상거리·성주거리·대감거리 등의 신들이 된다.
따라서 가신 신앙과 무속 신앙에는 서로 겹치는 면이 많으며, 이러한 경향은 마을 신앙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을이나 공동체의 서낭굿·대동굿·별신굿 등에서도 위의 조상거리·성주거리 등은 주요한 굿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가신 신앙과 무속 신앙이 근원적으로는 같았을 가능성도 많다.
그런데 고대 부락 국가의 종교 행사들에 관한 언급은 일찍부터 기록에 나오고 신성 무구(神聖巫具)도 많이 출토되었으나, 가신 신앙에 관해서는 그 성격상 기록이나 출토품이 없다. 지금까지의 가신 신앙 연구도 무속 신앙 연구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져왔고, 독자적인 주제로 관심을 모으는 경우는 적은 편이었다.
[안택과 고사]
안택(安宅)과 고사(告祀)는 여러 가신들에 대한 종합적인 제의(祭儀)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세종 때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부터 보인다. 즉, “사대부의 집에서 매해 초에 기복(祈福)을 하고, 수선(修繕)이나 영조(營造) 등의 경우에는 양재(禳災)를 하는데, 반드시 장님 5, 6명을 써서 독경을 한다.”고 했으니 분명히 안택의 일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상원(上元)에서 정월 말 사이에 소경을 불러서 안택경을 읽으며 밤을 새워 액을 막고 복을 빈다.”고 하였고, 또한 “시월을 상달이라 해서 무당을 데려다가 성조신을 맞아 떡과 과일을 놓고 안택하기를 기도한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안택과 고사에 관한 기록이 분명하다.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안택과 고사는 지방에 따라서 이름이 다양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 안택과 고사이나, 그 구분은 선명하지 못하다. 다만, 고사는 정월에 지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추수 뒤에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감사제의 성격이 강하고, 수시로 지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포천의 가신 신앙]
가신으로 포천뿐만 아니라 경기도에서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 성주와 터주였다[『한국 민속 종합 조사 보고서』-경기도편]. 터주는 택지신(宅地神)이다. 그 신체는 대개 항아리에 쌀이나 벼 또는 콩·팥을 같이 넣어서 짚주저리[볏짚으로 우산처럼 만들어서 터주, 업의항 등을 덮는 물건]를 씌우고 뒤뜰 장독대 근처에 놓아둔다. 그러나 전쟁과 새마을 운동 등으로 인하여 가족 구조가 완전히 변해서인지 이미 그 본래의 기능이 많이 퇴색된 것으로 보인다.
제보에 의하면 6·25 전쟁 당시 폭격과 소개 이후 새로 입주한 집들이 태반이어서 집안에 가신을 모시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영북면 소회산리 주민, 최응호]. 그럼에도 아직도 관습적으로 봄·가을에는 가정의 편안과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는 집이 가끔 남아 있다. 현재 가신을 모시는 집은 별로 없으며, 차츰 없어져 가는 추세이다. 가정의례의 고사는 10월에 많이 지냈으나 현재는 형식적으로 고사를 지낼 정도로 남아 있다고 한다[소흘면 직동 3리 주민, 이호용].
가정 신앙의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군내면에는 용정 3리에 터주항아리를 모시는 곳이 아직 남아 있고, 신북면 덕둔 2리에도 터주가리가 있고 아직도 고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내촌면의 진목 2리, 진목 4리, 마명 2리, 내 3리, 소학 1리 등에서도 터주가리가 있고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가산면 가암 1리에는 성주를 모시고 고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소흘면의 송우 1리, 무림 2리, 이곡 2리, 직동 2리, 직동 3리와 화현면의 명덕 1리, 화현 5리 등에서는 가신을 모신다고 하나 터주가리는 없다고 응답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성주와 터주가리를 중심으로 가신을 모셨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직도 성주를 모시고 있다고 판단되고, 추수 후에 고사를 지내는 곳이 가끔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모 1리, 고모 2리, 초가팔 2리에는 성주뿐 아니라 터주가리도 일부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주와 터주가리뿐만 아니라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소회산리 주민 최응호의 증언에 의하면 동네 80살 정도의 할머니 한 분이 조왕신을 모시고 매일 부뚜막에 청수를 떠 놓고 있다고 한다.
[현황과 의의]
문화가 변동하는 과정에서 대개 물질적인 측면은 빨리 변하고 정신적인 측면,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신앙의 측면은 변화의 속도가 가장 늦다. 그러나 근래에 사회나 문화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매우 격심해서 신앙 전승까지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터주나 업, 문신(門神)이나 측신(廁神) 등은 이미 거의 다 사라져 가고 있으며, 사례 자체가 매우 드물고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구나 조령 신앙은 일찍부터 유교 제례에 가려서 영남이나 호남 지방에서조차 전승 자료를 얻기 어려울 만큼 소멸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근대화의 사회·문화 변동과 함께 가신 신앙은 점점 더 사라져 갈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가신 신앙은 무속 및 동제의 전통과 거의 일신 동체로서 워낙 그 뿌리가 깊으므로 그다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가정과 관련된 전통적인 가치관들을 대변하면서 민간의 종교적 심성의 저변에 계속 흐를 것이다.
본래 가신 신앙은 유구한 한민족의 농경 생활의 역사에서 그 생활과 밀착되어 온 종교 현상이었다. 가신 신앙은 자연을 대하는 겸허한 마음가짐의 기반을 이루어 왔으며, 특별한 행사보다는 대개 가족의 생일이나 제사 또는 명절에 마련한 음식을 바쳤다가 물리는 식으로 주부들을 중심으로 매우 검소하게 전승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