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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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官衙址 |
영어의미역 | Government Office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있는 조선시대 관아 터.
[개설]
조선시대 논산 지역은 니산현(노성현)·연산현·은진현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세 지역은 조선시대에 폐합되거나 분리되는 변화를 겪었는데, 조선시대에 군현이 폐합되는 경우는 그 지역에서 역적 또는 강상(綱常)의 죄인이 발생하거나 변란과 재해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어 독립 군현으로 기능하기가 곤란할 때였다. 이렇게 한번 폐합된 군현은 수년이 흐른 뒤에야 복구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46년(인조 24) 니산현 사람인 유탁(柳濯)이 모반을 일으켰으며, 이에 대한 조치로 정부에서는 은진현·니산현·연산현을 폐합하여 평천역(平川驛) 서쪽에 은산현을 설치하였다. 이후 10년 만인 1656년(효종 7) 세 현을 복구하였고, 그 후로는 별다른 변화 없이 세 현이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해 오다가 1895년(고종 32) 군으로 바뀌었다.
[관아 시설]
군현의 관아에는 수령의 정청인 동헌, 국왕의 위패를 모셔 둔 객사, 고을 양반들의 대표자 격인 좌수와 별감이 있는 향청, 아전들의 근무처인 질청, 기생과 노비들이 머무는 관노청, 그리고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고 무기를 보관하는 군기청 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개의 경우 관아는 진산(鎭山)을 등지고 그 기슭에 남면하여 자리 잡았고, 관아 시설은 유사시 방어에 유리하도록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상시 주민들은 성 바깥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읍성은 대개 평지에 인위적으로 쌓은 성으로, 읍성에는 관아를 중심으로 하여 대개 T자형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길을 따라 시장·향교·사직단·민가 등이 들어섰다. 관아는 도시계획상 좌표의 기준점이었고, 그 중에서도 객사는 다른 건물의 위치나 거리를 나타낼 때 기준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읍치의 공간 구성은 일제강점기 때 변용, 파괴되었다. 일제는 대개 관아 시설에 면사무소, 보통학교, 보건소, 지소 등 근대적인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을 설치하였고 읍치를 개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읍치 구성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논산 지역의 경우 노성현 관아지, 연산현 관아지, 은진현 관아지 등 세 곳의 관아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노성현 관아지]
니산현은 1777년(정조 1) ‘니산’이 임금의 이름과 같다 하여 고을 이름을 이성(尼城)으로 고쳤고, 1800년(정조 24) 8월 20일 이성을 다시 노성으로 고쳐 노성현이 되었다. 노성현 관아는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구 면사무소 자리로 추정된다. 『노성군읍지』(영조 연간)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관아 관련 건물로, 아사 38칸, 객사 31칸, 현사 3칸, 작청 6칸, 군기 6칸, 관청 13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호서읍지』(1895년)에는 아사 15칸, 책실 6칸, 내사 12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에 들어 오히려 그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산현 관아지]
연산현 관아는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연산아문과 연산공원 일대로 추정된다. 『연산현지』(정조 연간)에 의하면 아사는 동헌 8칸, 내아 10칸, 익랑 5칸, 중문 3칸이 있었다고 한다.
[은진현 관아지]
은진현 관아는 은진면 연서리 은진초등학교 일대로 추정된다. 19세기 말 작성된 『은진지도』를 살펴보면 관아 시설의 구조와 배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은진지도』에는 외삼문·내삼문·아사·외노방·군고·형청·누상고(樓上庫)·사령방·책실·내아문·내아·읍창·창고·향청·관청·장청병현사·작청·삼문·객사·옥 등의 관아 관련 시설물이 표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