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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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喪輿 |
영어의미역 | Funeral Bier |
이칭/별칭 | 영여,온량거,행상,용여,구여,상차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집필자 | 김효경 |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시신을 장지로 운반하기 위해 만든 의례용 도구.
[개설]
상여는 사람의 시체를 실어서 장지까지 나르는 도구로, 마을마다 마련해 두기도 하고 초상이 나면 개인을 위해 만들기도 한다. 상여를 메는 사람을 상여꾼·상두꾼·영구꾼·영여꾼·운상꾼·이정·향도라 하며, 대개 천민이 메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후에는 동네 청년들이나 망인의 친구들이 메기도 한다.
상여꾼들은 상여를 메고 가면서 「상여 소리」를 부르는데, 「상여 소리」는 메기는소리와 받는소리로 나뉜다. 메기는소리는 한 사람이 앞서 부르는 소리이며, 받는소리는 메기는소리를 여럿이 함께 받아 부르는 소리로 일종의 후렴구이다. 메기는소리는 대개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을 알려 주오”와 같이 죽은 이를 애도하는 내용이며, 받는소리는 “어화 넘자”와 같이 여러 사람이 상여를 옮기는 데 보조를 맞추기 위한 단순한 후렴구로 이루어진다.
[연원 및 변천]
상여는 중국의 옛 문헌 『예기잡기(禮記雜記)』에 구여(柩輿), 상차(喪車)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문헌인 『사례편람(四禮便覽)』·『상례비요(喪禮備要)』 등에는 상여(喪輿)라 기록되어 있다. 상여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인 이재의 『사례편람』에 따르면, “대여(大與)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하기 힘들므로 상여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쓰여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에 따르면 대여는 국장에 사용되는 기구였다고 한다. 상여의 기원이나 발생은 기록이 없어 확실한 내력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상여 한 틀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엿집을 짓고 그곳에 상여를 보관하였다. 요즘에도 동네의 상포계에서 갹출한 비용으로 동네에서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는 상여를 마련하여 두는 곳도 있지만, 보통은 값이 싼 일회용 꽃상여를 만들어 사용한다.
[형태]
상여의 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나 더 길다. 몸채 좌우에는 밀채가 앞뒤로 길게 뻗어 있어 양쪽 끝에 채막대를 가로로 대고, 앞채막대 좌우로 2줄씩 끈을 달아 뒤채막대에 붙잡아 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멜방망이를 좌우로 끼워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 끈을 어깨에 멘다. 몸채는 단청식으로 여러 가지 채색을 하고, 4귀에는 기둥을 세워 위로 포장을 쳐 햇빛을 가리며, 상여 뚜껑에는 연꽃·봉황 등으로 장식한다. 대개 상여 틀을 분해·조립할 수 있게 만들며, 쓰이는 목재는 소나무·자장나무·피나무 등이다. 이들 나무들은 조각할 때 연장발을 잘 받으며, 오래되어도 형태가 잘 보존된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는 상여와 관련한 특별한 관행이 전한다. 조선 후기 충청도의 거족(巨族)으로 군림했던 연산의 광산김씨 집안에서는 초상이 나면 며느리들을 모두 흰 가마에 태웠다. 이를 ‘힌등타기’라 하는데, 죽은 자가 타는 상여와 달리 초상의 또 다른 행렬을 이룬 흰 가마는 상여와 더불어 논산 지역의 특별한 장례 풍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죽은 자를 운송하는 상여와 더불어 한 집안의 며느리들을 태운 흰 가마 행렬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관행으로, 당시 내외법(內外法)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