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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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泰寺 |
영어의미역 | Gaetae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08[계백로 2614-11]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갑동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대한불교법상종 소속 사찰.
[건립경위 및 변천]
936년(태조 19) 황산군(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이 부처님의 은혜와 산신령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여 연산면 천호리에 개태사를 창건하기로 하였다. 940년 개태사가 완공되자 왕건은 화엄법회를 열고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다.
왕건은 이 소문에서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음조에 부응하기 위해 관청에 명하여 연궁(蓮宮, 사찰)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산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천호산에 개태사를 창건한 동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진전(眞殿)’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라에 변란이 발생할 때에는 제사를 주관하였다. 또한 국가 대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는 사찰이었으며 공민왕의 경우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그 가부를 점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태사는 태조 이후로는 개경과 거리가 멀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우왕 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서 방화·약탈되었고, 도원수 임인계가 왜구를 맞아 싸우다가 죽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세종의 불교진흥책으로 잠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되었다. 1934년 여승 김광영(金光營)이 개태사지에 매몰되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세우고 현재의 자리에 절을 짓고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부르기도 했으나 최근에 다시 개태사라 하였다.
[관련문화재]
보물 제219호 개태사지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개태사 오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인 개태사지 석조,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 철확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모두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독특한 조각 양식과 분위기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현황]
충청남도 논산시는 국가사업 차원에서 개태사지를 복원하여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비 41억 1500만 원, 도비 20억 5700만 원, 시비 20억 5800만 원 등 총 82억 3000만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2008년 현재 사찰 복원지를 포함하여 총 2만 8,907㎡의 부지에 주차장, 휴게 지역, 진입로 등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