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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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誠一 |
영어음역 | Kim Seongil |
이칭/별칭 | 사순(士純),학봉(鶴峰),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고정은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진(金璡)이고, 동생은 김복일(金復一)이다.
[생애]
1556년(명종 11)에 아우 김복일과 함께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이황의 『자성록』·『퇴계록』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그 후 다시 관직에 복직되어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 입장을 취했다. 임진왜란 중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었으며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왜적을 대항하는 모의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활동사항]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가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파직하여 서울로 소환되어 오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 산음, 단성, 삼가, 거창,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모으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 의병을 모집했다. 또한 의병과 관군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학문과 사상]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해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했으며, 그 학통이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두씨통전(杜氏通典)』·『구씨의절(丘氏儀節)』·『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해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저술]
저서로는 『해사록(海槎錄)』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鶴峰集)』이 만들어졌다.
[상훈과 추모]
1664년(현종 5)에 신도비가 세워졌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