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6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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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영어음역 | sachal |
영어의미역 | temple |
이칭/별칭 | 절,사원,정사,승원,가람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집필자 | 최인선 |
[정의]
불상을 모셔 놓고 승려들이 거처하면서 불도를 닦고 불교 교리를 설하는 곳.
[개설]
사찰은 절·사원(寺院)·정사(精舍)·승원(僧院)·가람(伽藍) 등으로 불린다. 불교 사찰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의 상가라마(Sanghrma)이다. 교단을 구성하는 비구(比丘, 남승)·비구니(比丘尼, 여승)·우바새(優婆塞,남자 신도)·우바이(優婆夷, 여자 신도)의 사중(四衆)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중국에서 승가람마(僧伽藍摩)라고 음역(音譯)하였고, 나중에 줄여서 가람이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출가자(出家者)들은 무소유(無所有)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않고 독신 생활을 하면서 걸식(乞食)으로 수도생활을 영위하였다. 숲 속의 동굴이나 큰 나무 아래에서 선(禪)을 하거나, 유행(遊行)을 통하여 불법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기후적 특성 때문에 우기(雨期)에는 이 같은 생활이 불가능하였는데, 특히 7~8월의 장마철에는 바깥에 나가기보다는 한 곳에 모여 수도에 정진하는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우기인 석 달 동안은 바깥출입을 삼가는 것을 계율로 정하고,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적절한 공동생활을 하도록 함에 따라, 안거(安居)할만한 장소를 불교 신도들이 스스로 마련하게 되었다.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안거 장소는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비롯하여 수다타[須達多] 장자(長者)가 동산을 온통 금으로 장식하였다는 기원정사(祇園精舍) 등이 있다. 정사는 불교 교단의 공동 재산이었고, 안거를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따라 불교사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초기의 사찰은 처음에는 이같이 단순한 공동 주거지의 성격을 띠었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종교의례를 집행하는 성소(聖所)로 그 성격이 승화하게 되었다. 이로써 사찰은 그 규모나 숫자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고, 조형 예술품 등 불교 건축의 찬연한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다.
[현황]
진도군의 전통 불교 건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찰과 사지로는 쌍계사(雙溪寺), 해원사지(海院寺址), 죽림사지(竹林寺址), 영흥사지(永興寺址), 용장사지(龍藏寺址), 한사리사지(寒寺里寺址) 등이 있다.
쌍계사는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서쪽의 평지에 있는 사찰이며 현재는 대흥사 말사이다. 조선 후기의 지리지류에는 모두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복원되어 대웅전, 시왕전,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해원사지는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94-1번지 일대인 현재 금성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오층석탑(보물 529호) 부근으로 전한다. 1973년 학교 주변을 정리하면서 많은 석재와 초석·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해원사지는 해언사(海堰寺)·해안사(海岸寺)·해월사(海月寺) 등으로도 전해내려 온다. 죽림사지는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마을 뒤 북서쪽 500m 지점의 여귀산 동쪽 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죽림사지에서 죽림사라고 단정할 만한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구전과 ‘죽림(竹林)’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미루어 죽림사로 추정되고 있다. 영흥사지는 진도군 임회면 죽림사지에서 북쪽으로 50m 떨어진 지점으로 추정된다. 이 영흥사는 1930년경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용장사지는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52번지에 위치하며 현재 사찰이 복원되어 있다. 초창은 고려 초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별초군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의 법당은 최근에 지은 것이며, 진도 용장성에서 약 200m 떨어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한사리사지는 진도군 군내면 한사리 190번지, 즉 한사리 마을 뒤 북쪽 편의 마령산 아래 저평한 구릉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한산사(寒山寺)’ 또는 ‘한사’로 전하고 있지만 문헌기록에는 없다. 주민들은 이곳을 ‘절고랑창’ 또는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