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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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牧場 |
영어의미역 | stock farm |
이칭/별칭 | 목마장(牧馬場)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옥 |
[정의]
가축을 방목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초지, 건물, 목책 등을 설치해 놓은 지역.
[개설]
조선시대의 목마는 교통·군사·농경, 외교상의 교역품, 식용, 그리고 말가죽·말꼬리·말갈기 등의 일용품 등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마정(馬政)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예기(禮記)』에서 ‘나라의 부를 물으면 목마의 수효로 대답한다.’라고 할 만큼, 전통시대 목마는 국가의 부강을 평가하는 요소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중앙 정부는 말을 길러 국용을 조달하고 동시에 중국과 말 무역을 하였다. 1408년(태종 8)에 말 430필이 요동으로 보내졌고, 1423년(세종 5)에는 중국에 보낼 목마 10,400필이 전국 각도에 분정되었다. 이때 전라도에는 1,350필이 배정되었다.
전라도의 기후 조건은 겨울철에도 크게 춥지 않아서 목마가 풀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으로 인해 전라도는 일찍부터 목장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특히 물과 풀이 풍부한 섬과 바닷가 연안 지역은 말을 방목하기에 최적지로 평가되었다. 이에 조선 전기 중앙 정부는 전라도 서남해 도서 연안 지역에 목장을 설치하였다. 다음 (표 1)은 15세기 전라도 서남해 도서 연안 지역에 설치된 목장의 분포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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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15세기 서남해 도서 연안에 설치된 목장
(표 1)에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15세기 서남해 도서 연안 지역에 설치된 목장은 총 34개소이다. 지역별로 구분해 보면, 나주(9)·진도(6)·고흥(5)·무안(3)·해남(3)·강진(3)·장흥(2)·영암(1)·순천(1)·영광(1) 순이다. 특히 나주와 진도에 목장이 가장 많이 개설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조선시대에 섬과 곶은 목장지 후보지로 최적지로 평가되었는데, 나주목은 오늘날 신안군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도서를 부속 도서로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도 목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초기 1413년(태종 13) 10월에 나온다. 당시 제주도에서 사육하던 말을 진도의 고읍(古邑)으로 옮겨와 방목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414년(태종 14) 1월에 정부는 제주도안무사 윤임에게 명하여 암수 목마 1,800필을 골라서 진도로 옮기도록 하였다.
진도에 목마가 반입되자, 전라도관찰사는 목장에서 일할 사람과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병선 배치를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정부는 추자도에서 살고 있던 주민 일부를 진도로 옮겨주고, 이들 이주민들이 진도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10년 동안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줌과 동시에 내륙 지역 시위군으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진도 목장을 수호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있은 지 6개월이 지난 1414년(태종 14) 9월에 전라도관찰사 김정준이 “진도 목장은 목초지로 부적당하다.”라며 진도 목장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태종은 “지난날에 ‘진도 목장의 수초가 두루 족하고 풍토가 제주와 다름없다.’라고 해서 목장을 만들었던 것인데 불과 1년 만에 이를 번복하니, 진도 목장을 혁파할 수 없다.”라며 허용하지 않았다.
진도 목장의 존폐 문제를 놓고 중앙 관료들 간에 의견이 양분되었다. 전라도관찰사 김정준을 비롯한 지방관들은 “진도의 풀이 모두 띠[茅]이므로, 말이 먹지 못하여 파리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목장 혁파를 주장하였고, 반면 병조참의 권만 등 중앙 관료들은 “진도의 풍토는 다른 목장에 비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니 절대 가볍게 버릴 수 없다.”라고 하면서 존립을 주장하였다. 결국 진도 목장은 전라도 지방관들의 주장에 따라 설치한 지 1년 만에 혁파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진도 목장 혁파 이후 30년이 지난 1445년(세종 27)에 하삼도 순찰사 김종서가 진도에 다시 목장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1446년(세종 28) 진도에 5개 목장이 설치되었다. 즉 여귀산 목장(女歸山牧場) 2개소, 금갑도 목장(金甲島牧場) 1개소, 부지산 목장(富支山牧場) 1개소, 해원곶 목장(海原串牧場) 1개소 등이 그것이다.
15세기 전라도 지방관들의 주장처럼, 진도는 목초지로서 부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지방관들은 목장 운영으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하자, 서둘러 목장 혁파를 건의하였던 것이다. 섬에 목장을 새로 개설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땅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을 집단 이주시켜야 하고, 또 무엇보다도 목자와 목마를 해적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문제가 최대 관건이었다. 이런 부담감 때문에 지방관들은 목장 설치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부의 입장은 섬에 목장을 설치할 경우 국용마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고, 또 변방에 해당하는 도서 지역까지도 직접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목장 설치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목장 인근 지역 지방관들에게 목장 관리와 운영의 책임을 부과하였다. 즉 고을 수령과 만호로 하여금 감목관직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진도의 경우 진도군사(珍島郡事)가 여귀산 목장(제1소)을 비롯하여 부지산곶 목장과 해원곶 목장을 관리하였고, 금갑도 만호는 여귀산 목장(제2소), 남도포 만호는 여귀산 목장(제3소) 등을 각각 관장하였다.
조선 후기 진도 목장의 변천 과정은 역대 지리지에서 비교 검토할 수 있다. 다음 (표 2)는 조선 후기 지리지에서 진도 목장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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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조선 후기 지리지에서의 진도 목장 관련 내용
(표 2)를 종합해 보면, 조선 전기에 설치되었던 진도 목장은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존속한 것으로 확인된다. 다만 조선 전기에 여귀산 목장이 3개소로 운영되고 있어 규모면에서 다소 컸던 반면, 조선 후기에는 지력산 목장이 남도포 목장, 첨찰산 목장, 부지산 목장 등을 관할하면서 진도 지역의 중심 목장인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후기 진도 목장에 감목관 1인이 파견되었고, 목자수는 약 133명~330명 정도로 확인된다. 목마 수는 800필~1440필 정도가 방목되었고, 곡초는 8000속, 전답은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절수전답(折受田畓)이 200여 결, 군사들의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지급된 둔전답이 100여 결로 확인된다.
[현황]
2005년 현재 진도 목장 관련 현지답사를 실시하여 확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도 목장 관련 시설물을 확인할 수 없고, 현전하는 지명과 비석에서 그 흔적이 확인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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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진도 목장 관련 역사문화 자원
[의의 및 평가]
진도 목장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다가 한말까지 존립하였다. 이런 까닭에 진도 목장은 타 지역에 목장을 신설하거나, 혹은 목장 운영으로 인한 사회 문제가 발생할 경우 대부분 진도 목장 운영 사례에 따라 해결하였다. 이런 사례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쉽게 확인된다. 따라서 진도 목장은 이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 원형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