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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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 |
영어의미역 | Protestantism |
이칭/별칭 | 그리스도교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명철 |
[정의]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 로마 카토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그리스도교의 분파.
[연원]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는 1884년 9월 알렌(Horace N. Allen)을 파견하여 한국의 평안도 지역과 경상북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1892년에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 7명의 선교사들은 호남 지역에서 활동했다.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회 소속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목사와 드루(A. D. Drew) 의사는 한국인 어학 선생인 서선생과 동행하여 1894년 3월 7일부터 5월까지 2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군산→전주→고창→영광→함평→무안→목포→우수영→진도→녹동→벌교→순천→여수→남해 등을 답사하였다. 이 기간에 두 선교사는 각 고을을 돌며 장터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 따라서 진도에 기독교가 맨 처음 전파된 것은 1894년 4월이 된다.
호남 남해안 지역에 대한 선교는 목포선교부 설립자인 벨(Eugene Bell)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뒤를 1903년 10월 목포선교부에 부임한 프레스톤(John F. Preston) 목사와 1907년 가을에 부임한 맥컬리(Henry D. McCallie) 목사가 이어받았다.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진도 선교는 1905년 가을 프레스톤 목사와 오웬(Clement C. Owen)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맥컬리 선교사에 의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볼 때, 진도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목포선교부 소속 선교사들과 우수영 교회와 깊은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교 과정]
목포선교부 설립자인 벨 목사는 1897년 3월부터 9월까지 나주에서 선교하다가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하였다. 그러나 1897년 10월 1일을 기하여 목포항이 개항되자 벨 목사는 목포 양동에 2,500평 정도의 토지를 구입하고 1898년 3월부터 집을 지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벨 목사와 오웬 목사는 목포 양동에 한옥으로 집을 지었는데, 목포 사람들은 이 집을 방문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아 하루 방문자가 200여 명에 이르렀다. 방문자들은 하늘에서 비 오고 눈 오는 기계를 보여 달라고 했고, 바늘과 가위를 몹시 탐내기도 하였다. 더욱이 선교사들의 부인이 입는 옷과 구두 그리고 양산은 개화를 꿈꾸던 목포 여성들에게는 큰 부러움이었다.
오웬 의사가 개설한 목포선교병원에서는 복어를 먹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주기도 했는데, 목포와 인근 지역에 신의(神醫)가 왔다는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진도 사람들이 목포 양동의 선교사 집을 구경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진도를 방문한 시기는 1905년이다. 이 때 진도에 온 프레스톤 목사, 오웬 목사, 의사인 다니엘(T. H. Daniel)은 서울에서 유배 온 젊은 선비를 만나 전도했으며, 분토리교회에서 최초로 예배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인력 부족과 협력자들의 부족으로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맥컬리 선교사가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단계에 이른 1908년 가을에 본격적인 전도를 목적으로 진도를 방문할 수 있었다. 프레스톤 목사와 맥컬리 선교사는 1주일 동안 진도에 머물렀고, 그 결과 6개의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1909년에는 맥컬리 선교사가 간호사인 코르델(Miss Emily Cordell)과 결혼하면서 부모에게 선물로 받은 배를 타고 포싸이트(W. H. Forsythe) 의사와 함께 진도 인근의 섬을 돌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시작된 진도 선교의 결과로 1905년에 분토리교회, 1919년에 중앙교회, 1921년에 금갑교회, 1927년에 고군중앙교회, 1931년에 중굴교회, 1946년에 벽파교회, 1952년에 의신중앙교회 등이 세워졌다. 2006년 현재 진도에는 본도에 75개의 교회가 있으며 인근 섬까지 포함하면 105개의 교회가 있다.
[목회자와 순교자들]
정경옥 목사는 1901년 진도군 임회면에서 태어나 1927년에 감리교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에 미국 개럿 신학교와 1931년에 노스웨스턴 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부터 감리교 신학대학교와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4년에『기독교의 원리』를 펴냈고, 1939년에 한국 최초의 조직신학 교과서 『기독교신학개론』을 펴내면서 한국 기독교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1945년 5월 광주교구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박석현 목사는 1901년 10월 19일 진도읍 교동리에서 태어나 진도소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에 진도 청년책임자로 참가했다가 목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후 피어선신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 임직을 받고 나주읍교회에 부임했고 1949년 4월에는 광주 양림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9월 27일 영암에서 친북 세력들에게 잡혀가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중앙교회 담임목사인 김수현 목사와 박해운 장로도 한국전쟁 당시에 순교했다. 김수현 목사는 전라북도 부안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인민군이 전라남도를 장악한 후 곧바로 처형되었다.
박종해 안수집사(후에 장로 추서)도 한국전쟁 때 진도군 의신면에 피신해 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벽파교회의 오교남 전도사도 친북 세력들에게 붙들려 순교하였다.
[진도 교회의 현황]
2005년도 현재 진도 군내에 속한 100여 개 교회는 기독교 교단협의회를 구성하여 해마다 종교 행사와 함께 군민 구호 활동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 중에서 진도가 자랑하는 신비의 바닷길 행사를 ‘모세의 기적’으로 알리면서 전국 교회의 순례를 초청하는 등 진도의 위상을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다음은 2005년 현재 진도에 있는 개신교 교회들의 명칭과 소재지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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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