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11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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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齊州郡六十年- |
영어음역 | Bukjejugun 60Nyeonui Eojewa Oneul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동전 |
[개설]
북제주군은 제주특별자치도 북부와 부속 도서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1946년 8월 1일에 시작되어 2006년 6월까지 존속했던 행정구역으로 2006년 7월 1일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로 출범하면서 제주시에 통합되었다.
[연혁]
탁라(乇羅)라 불리면서 5세기 후반부터 한반도 내 고대국가와 관계를 가졌던 제주 지역은 백제·신라에 이어 고려와 속국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비교적 독립적인 지위를 견지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인 1105년(숙종 10)에 이르러 직할군인 탐라군으로 편제되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제주도는 한때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고 원나라의 목마장이 설치되었다.
1300년(충렬왕 26)에는 제주도를 동도·서도로 나누고 14개의 현촌(縣村)을 설치했는데, 지금의 북제주군 지역에는 귀일(貴日)·고내(高內)·애월(涯月)·곽지(郭支)·귀덕(歸德)·명월(明月)·신촌(新村)·함덕·김녕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416년(태종 16)에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에 제주목(濟州牧)을 두고 제주목사를 파견했다. 제주목의 관할 구역이 오늘날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에 해당한다. 별호는 영주(瀛州)였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제주부 제주군, 1896년에 전라남도 제주목이 되었다가 1906년에 다시 제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정의군·대정군 전역과 완도군의 추자면을 편입하여 제주도 전역을 제주군으로 포함하고, 중면을 제주면으로 개칭했다. 1915년에 군제가 도제(島制)로 바뀌어 전라남도 소속 제주도(濟州島)가 되었다.
1931년에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했다. 1946년에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 도(道)로 승격되면서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이 신설되었다. 1955년 제주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고, 1956년 한림면이 한림읍으로 승격되면서 한경면이 신설되었다. 1980년 애월면·구좌면, 1985년 조천면을 읍으로 승격하고, 1986년에 구좌읍 연평리를 분리, 우도면으로 승격시켰다. 2006년 7월 1일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서 제주시로 통합되었다.
[정치와 행정]
1. 1940~1950년대의 북제주군
이 시기는 북제주군이 자치단체가 아니라 제주도의 보조 행정 기관이었기 때문에 군정이 독자적 시책에 따라 추진되지 못하고 주로 도의 시정 방침을 수용하여 이루어졌다. 군제 실시 초기인 1940년대 후반은 좌·우익의 대립과 4·3사건이 일어나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태풍과 가뭄 등으로 농작물 생산이 감소되어 농촌에 식량 부족 현상이 자주 발생하였다.
또 좌익 무장 세력의 진압을 위해 중산간 부락 주민들이 해안 부락으로 소개되고 중산간에 우마 방목이 금지됨으로써 주민 생활이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이에 따라 군정은 치안 유지와 민생 구호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산업 진흥에는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1950년대 초반에 4·3사건이 계속되는 가운데 6·25전쟁이 일어나 육지부에서 많은 피난민들이 들어옴에 따라 군정은 이들 피난민과 4·3이재민의 구호에 전력하는 한편, 긴급 구호곡의 방출, 양곡 소비 절약 운동 등을 통해 농촌 주민들의 절량 사태에 대처하였다.
한편 4·3사건이 진압됨에 따라 군정은 1950년대 중반부터 중산간 주민들의 원주지 복귀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고 축산 진흥, 임산물 개발, 특용작물 개발 등 1차산업 진흥계획을 마련하였으나 재정 부족과 개발 의욕의 결여 등으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 1960년대의 북제주군
군이 지방자치단체가 됨을 계기로 북제주군은 1960년대부터 자체적 판단에 따라 군정 방침을 정하여 군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는 제주 개발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관심과 주민들의 개발 열망이 어우러져 개발 기반이 구축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부가 제주도 전역을 특정 지역으로 지정하고 제주 개발을 특별 지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특정 지역 계획을 추진하게 됨에 따라 북제주군은 지역 개발, 농어민 소득 증대, 관광 개발에 역점을 두고 각종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지역 개발 측면에서는 중산간 우회도로, 동부산업도로, 서부산업도로를 비롯한 도로개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용수 개발 사업도 본격화되었다. 산업·경제 측면에서는 유채, 고구마 등 환금 작물 증산이 이루어져 농가 경제에 크게 기여하였고 축산 개발 계획을 시행하여 개량 초지 조성과 가축 인공 수정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 수산 진흥 계획도 추진하여 수산물 가공 처리 시설의 설치, 동력오선 건조 사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구호 행정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어 계획적 자활 지도로 전환하기 시작하였고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취로 사업 실시, 가족 계획사 업도 활발히 추진되었다. 아울러 관광 시설 확충, 관광 홍보, 관광 안내원 교육 등 관광 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사업들도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3. 1970년대의 북제주군
1970년대는 1960년대에 구축된 개발의 토대를 더욱 다져 주민 소득 증대와 환경 개선을 이룩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군정이 행정력을 가장 많이 집중한 사업은 새마을운동과 제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른 개발사업의 추진이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행정 주도에 의해 3단계를 거치면서 추진되었다. 단계별 역점 사업으로 1단계는 환경 개선과 생산 기반의 조성, 2단계는 농어촌 소득원의 개발, 3단계는 농어촌 복지기반의 확충과 올바른 사회 윤리의 확립에 두었다. 새마을운동은 지역 주민들의 소득 증대와 환경 개선을 가져와 도·농 격차를 완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70년대 중반부터는 제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우회도로를 비롯한 간선도로의 확장·포장, 통신망 등 각종 기반 시설의 확장·정비가 이루어졌으며 한림읍을 비롯한 읍지구가 도시계획 지구로 되고 전화 사업도 활발하게 추진되어 대부분의 자연 부락에 전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산업·경제 측면에서 볼 때 농업 부문은 경지 정리 사업의 실시, 농업 용수 개발, 농기계 보급의 확대와 함께 감귤원 신규 조성 사업과 유통 처리 시설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축산 부분에서는 육우 개량과 목장 조성 사업 등이, 수산 부분에서는 한림 어업전진기지의 설치와 함께 인공 어초 시설, 패류 종묘 배양 사업 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상·하수도 사업과 취락 구조 개선 사업이 이루어져 주민들의 생활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으며 생활 보호 대상자에 대한 구호가 강화되고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됨으로써 일반 주민들도 조합을 구성하여 보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관광·문화 측면에서는 신규 관광지 조성, 관광 시설의 확충, 관광 홍보의 강화와 함께 지방문화재의 추가 지정, 문화재 보호 운동 등이 이루어졌다.
4. 1980년대의 북제주군
1980년대의 군정은 건전 사회 풍토 조성, 소득 증대, 주민 복지 증진, 지역 특화 산업 육성에 중점이 두어졌다. 1980년대 전반기는 사회 정화라 하는 국가 시책을 지역적 차원에서 구현하는데 전력하여 사회 비리 해소, 부정·부패 추방과 함께 질서 의식의 정착화를 위한 의식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새마을운동은 80년대에 들어와 민간 주도로 전화됨에 따라 행정이 직접 담당하지 않고 지원 행정 체제로 바뀌어졌다.
지역 개발 측면에서는 1980년대 전반기에는 제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른 각종 개발 사업이 추진되다가 후반기에는 특정 지역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이 시행됨으로써 이 계획에 의하여 도로, 용수, 항만 등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과 관광지 조성 사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중생활권인 읍·면별로 생활 편익 시설을 강화하는 한편 지역 특성에 따른 기능을 부여하여 특화된 개발을 유도하였다.
한편 산업·경제 측면에서는 감귤 증산과 근교 농업의 육성, 농외속 등을 통한 농어민 소득 기반 확충이 강조되었으며 1차 산업과 2차 산업을 연계시키기 위한 농공단지가 조성되고 어류 양식 사업과 한우 및 육우 증식 사업, 초지 재개량 사업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하수 위생 처리장 설치, 특별 청소 구역 지정 등 쓰레기 행정의 강호, 상수도 보급률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수질 오염 방지와 의료 보장 확대를 위한 사업도 계속 추진되었다. 또 관광·문화 측면에서는 관광지 정비 등 관광 수용 태세 강화와 함께 전통 문화의 발굴·육성을 위한 사업들이 이루어졌다.
5. 1990년대의 북제주군
1990년대의 군정은 1960년대 이후 개발 과정에서 계속하여 문제가 되어 온 주민 참여를 활성화시켜 지역 특성에 적합한 개발을 추진함으로써 동·서 지역 간의 균형 발전과 함께 세계화, 지방화의 구현에 역점을 두었다.
지역 개발 측면에서는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의 북제주군 실시 계획에 따라 관광지 조성과 용수 개발, 하수도 정비, 소도읍 정비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산업·경제 측면에서는 WTO체제의 출범에 따른 등 농·축·수산물의 수입 개발에 직면하여 지역 기반 산업인 1차 산업을 살리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농업 기반 시설의 확충, 특화 작목 중심의 수출 농업 육성,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사업들이 계속 추진되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생활 편익 시설, 노인 및 아동 복지, 체육 시설 확충, 저소득층의 안정적 생활 지원, 환경 오염 방지 사업 등에 역점을 둠으로써 지역 개발과 주민 복지를 조화시키는데 노력하고 있다. 또 관광·문화 측면에서는 관광지 개발을 위한 민자 유치를 추진함과 아울러 지역간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서부 지역에 관광지를 추가, 지정하였다.
한편 북제주군은 1991년 군의회 의원과 1995년 주민들이 자치단체장을 직접 산출하여 본격적 민선 자치가 시작되었다. 초대 민선 군수로 당선된 신철주는 군정 목표를 ‘최고의 1등 북제주군 건설’로 내걸었다.
지방 자치의 제도화를 계기로 신뢰 행정, 대화합, 지방 재정 확보를 위한 경영 행정 추진, 농수산물의 대외 경쟁력 확보, 지역의 균형 개발, 향토 문화의 전승과 군민 체육 진흥, 복지 농어촌 건설을 위한 기반 구축을 역점 시책으로 내세우고 주민을 위한 군정, 21세기에 대비하는 군정을 지향하였다.
6. 2000년대의 북제주군
민선 2기(1998~2002)의 군정은 IMF 체제라는 어려운 시기에 출범하여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의 1등 북제주군’ 건설의 확고한 기틀을 다지고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행정력에 집중하였다.
특히 침체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역점 시책으로 삼아 중소기업 육성 자금 지원 확대, 건설 공사 조기 발주, 지역 업체 제품 우선 구매, 공공 근로 사업 등 실업자 생계 안정 대책, 1차 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기반 구축과 고품질 농축수산물 생산, 이와 함께 노인과 스승 공경, 장애인 복지와 여성의 권익 신장 등 4대 특수 시책을 본격 시행함으로써 주민의 복지 수준을 한 차원 높여나갔다.
민선 1·2기에 이어 민선 3기(2002~2006) 군수로 3선의 영광을 차지한 신철주는 그동안 거둔 군정의 성과를 북제주군 발전의 견인차로 삼아 보다 큰 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군정 목표를 ‘세계로 미래로 도약하는 북제주군’으로 설정하였다. 이와 같은 군정 목표를 구현하기 위하여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 환경친화적 지역 개발, 세계 중추적 문화 관광, 더불어 사는 사회 복지를 군정의 4대 방침으로 정했다.
그러나 신철주 군수는 군정의 최우수 과제로 추진했던 제주돌문화공원,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조성, 제주형 바다목장화 사업, 어촌민속전시관 건립, 애월 소도읍 육성 등 역점 추진 사업에 따른 과로로 발병, 악화되어 2005년 6월 22일 타계하였다. 민선 3기를 끝으로 북제주군은 2006년 7월 1일 제주도가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되면서 제주시로 통합되었다.
[자연 환경]
북제주군의 경사는 남제주군보다 완만하며, 침식이 덜 된 화산원지형으로 되어 있다. 다른 시·군과는 한라산[1,950m]·흙붉은오름[土赤岳: 1,391m]·성널오름[城板岳: 1,215m]·거문오름[拒文岳: 718m]·노로오름[老路岳: 1,070m]·돌오름[440m]·두산봉[146m] 등을 중심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군내에는 140여 좌의 기생화산(오름)과 용암동굴이 발달했으며, 제주도 내의 조사·확인된 60여 개의 용암동굴 가운데에서 33개가 북제주군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에는 표선리 현무암층이 넓게 분포하며, 빌레못동굴(11.749㎞, 천연기념물 제342호)·제주도용암동굴지대(17.174㎞, 천연기념물 제236호, 협재굴·소천굴·쌍룡굴·황금굴 포함)·만장굴용암동굴계(15.678㎞, 천연기념물 제98호, 김녕사굴·만장굴 포함) 등 세계적인 용암동굴 지대가 분포하고 있다.
화산재·모래·자갈을 모재로 하는 화산회 토양이 대부분이고, 유기물과의 결합력이 커서 검은색 토양이 많다. 자갈 함량이 평균 12%나 되며, 토양 깊이도 7~35㎝(평균 18.3㎝)밖에 되지 않아 농경에 불리하다. 더욱이 투수율이 높은 표선리 현무암층의 건천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지하수를 개발해 농업 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한라산 산록에서 북류하는 고성천(古城川)·소왕천(昭王川)·어음천(於音川)·한림천(翰林川)·귀덕천(歸德川)·문수천(文水川)·수산천(水山川) 등은 모두 해안의 용암 말단부에서 용출하는 건천이며, 동·서 지역에는 수계 발달이 미약해서 서부의 금성천(錦城川)·옹포천(瓮浦川) 등이 있을 뿐이다. 옹포천은 유수가 있으나 그 수량이 적다.
해안선은 단조롭고 현무암초·단애가 많으며, 해안 지대에는 파식에 의한 패사해빈이 함덕·김녕·세화·곽지·협재 등지에 발달되어 있다. 때로 모래가 내륙 3~4㎞까지 바람에 의해 운반되어 광역 사구(砂丘)를 형성하기도 한다. 부속 도서는 면으로 승격한 추자군도와 우도에 집중되어 있으며, 유인도·무인도를 합해 50여 개에 이른다.
위도가 낮은 관계로 도처에 난대림 자생지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표고에 따라 반자연초지대·낙엽활엽수림대·혼효림대·상록침엽수림대·관목림대가 수직적으로 분포하는 식물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환경 현황]
북제주군은 한라산의 북사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푸른 바다와 드넓은 초원, 아름다운 오름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 환경과 황토색 짙은 전통 문화가 잘 보존된 청정 지역이다.
총면적은 722.3㎢으로 제주도 전체 면적의 39.1%, 해안선은 총길이 99.6㎞이며, 난대성기후 지역에 속하여 다양하고 풍부한 생물종 다양성과 생물 자원의 보고로써 청정 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산업 구조는 도·농 복합 지역으로 농·수축산업 등 1차 산업의 비중이 높은 반면 제조업 부문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편이다.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자연 자원의 무분별한 이용과 환경 오염 물질의 배출 증가로 인하여 환경질의 저하를 초래하게 되었다. 북제주군의 경우도 개발과 산업화로 인하여 청정 자연의 훼손을 초래하게 되었다. 산업 시설 폐수, 축산 폐수, 농가에서 사용하는 농약과 비료 등으로 인한 환경 오염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소득 및 지식 수준의 향상으로 쾌적한 환경에 대한 요구, 환경 오염 사고에 대한 위기 의식의 증가, 환경 오염 예방을 위한 주민 공감대가 증가함에 따라 주민 스스로가 환경 보전에 대한 인식 확산과 각종 단체의 환경 보전 활동이 자발적이고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북제주군은 환경 보전과 오염 사고의 예방을 위하여 환경 분야 투자 재원의 확대, 친환경 정책의 추진 등 환경 보전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민들의 생활]
1. 고달픈 보릿고개
북제주군은 예로부터 농경 위주의 생활을 영위해 왔으나 토지가 척박하고 기후가 고르지 못해 흉년이 자주 들었다. 1950년대 들어서는 다섯 해나 큰 흉년이 찾아 들었는데 특히 1957년은 40년 만의 대흉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1951년 초가을 태풍이 본도를 휩쓸고 지나가자 추곡 생산량이 계획량의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1952년 2월 들어 우도 등 도서 지방에서 시작된 절량 사태는 3월이 되자 전도에 파급됐고 특히 조천과 구좌, 한림 등 북제주군 관내 지역이 더욱 극심했다.
1953년의 절량 사태는 1월에 한림면에서부터 비롯됐다. 이곳에서 2명이 굶어 죽고 문전 걸식자가 평소보다 크게 불어났다. 전분 찌꺼기로 연명하거나 파래, 톳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주민들이 많았다. 1955년에도 북제주군 지역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도내 농가 46,000여 호 중 4,700여 가구가 식량이 떨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구좌면과 애월면 등 북제주군 지역이 가장 심했다.
1956년에는 9월에 본도를 휩쓴 태풍이 추곡 작황에 결정적 타격을 주어 40년 만에 처음이라는 흉작을 몰고 왔다. 이 해의 절량 사태는 지역을 거르지 않고 전도 일원에 고르게 나타났다. 중학교 진학률이 급격히 떨어졌고 점심 도시락을 지참하는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해조류나 고구마가 섞인 도시락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쌀 도둑이 늘어났는데 한림면 명월리에서는 7촌 숙부의 집에서 쌀 한말을 훔쳐 나오던 조카가 숙부에게 들키자 방구석에 있던 재떨이로 뒤통수를 내리쳐 숨지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게 본도 농촌에 거의 해마다 숙명처럼 찾아들던 흉년의 절량 현상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차츰 해소되기 시작했다.
2. 소득 증가와 의식주 변화
1950년대까지만 해도 먹고 입기에 급급했던 농어촌의 생활상이 196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저축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만큼 나아졌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의 본도 농가 경제는 연평균 70,400여 원의 잉여금이 생겨 전국 농가 평균 38,500여 원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북제주군의 농가 호당 수입과 지역 총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면서 그야말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한동안 기승을 부리던 이농 현상도 다소 수그러들었다. 뿐만 아니라 제주시와 인접한 읍면 지역에서는 오히려 농촌을 떠났던 주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역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주민 소득이 향상되면서부터는 의식주에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1950년대 들어서면서 그간 노동복으로 애용되어 온 갈옷이 사라지고 나일론으로 대표되는 합성 섬유가 인기를 끌었다. 식생활은 1950년대까지도 잡곡 위주였는데 거의가 미곡으로 바뀌어졌다. 또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부식도 기호나 영양가가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주택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전통적인 초가들이 슬레이트 집으로 개량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 철근 콘크리트에 의한 현대식 주택들도 들어섰다. 부엌 구조가 취사에 편리하게 되고 채광에도 유의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다세대주택과 전원주택 건설 붐이 크게 일었다. 바야흐로 주택이 주거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생활을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3. 가치관의 변모
북제주군을 포함한 제주 사회는 1940년대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폐쇄 사회였다. 이에 따라 근대적 의미의 군민 사회가 형성되지 못했으며 군민성은 배타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북제주군 군민들은 씨족 중심의 혈연 집단을 이루어 생활했다. 그런 까닭에 사회적 유대가 매우 두터웠다. 도둑·거지·대문이 없는 삼무 정신은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1950년대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군민의 생활 양식과 사고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내외 관광객의 쇄도로 주민들의 생활 감정도 달라지게 됐다. 전통적 유교 윤리에 기반을 두었던 기존 질서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려는 경향이 대두됐다.
가정은 핵가족화 현상이 두드러져 갔다. 이 같은 핵가족화는 가정의 내면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시발점이 됐다. 이와 함께 여성의 사회 진출도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또한 개인주의화 경향도 차츰 커졌다.
[사회 복지]
1. 복지 사업과 복지 시설
군제 실시 이후 초기의 사회 복지 사업은 체계적인 실시가 어려웠다. 4·3사건과 6·25전쟁으로 인한 혼란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흉년으로 사후 대책적 구호 활동을 크게 필요로 했다. 그러다가 1961년 12월 「생활보호법」이 제정되고 그 이듬해 원호처가 발족되면서 북제주군의 사회 복지 사업도 체계를 갖추게 됐다 1960년대에 「아동복지법」 등 수많은 복지 관계법이 마련되어 복지 사업과 그 활동은 법적 뒷받침 아래 전개될 수 있었다.
북제주군에 복지 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74년 6월 29일 샛별유아원을 시발로 1996년 말 현재 22개의 복지 시설이 설치되었다. 양로원으로는 1984년 2월 20일 인가를 받고 운영되고 있는 성이시돌양로원이 있다.이외에도 애월읍 고성리에 제주원광요양원과 조천읍 함덕리에 정신지체아 재활 시설이 확충돼 있다.
2. 생활 보호 및 의료보험
1950년대의 생활 보호는 주로 고아나 전쟁 미망인을 대상으로 한 시설 보호에 역점이 두어졌으나, 북제주군에는 1950~1960년대 초 복지 시설이 전무하여 많은 애로를 겪었다.
1961년 10월에 「생활보호법」이 개정됨에 따라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생활 보호 대상자로 선정돼 생계 보호와 의료 보호 등의 혜택을 받게 됐다. 그 대상은 65세 이상의 노약자, 18세 이하의 아동, 임산부, 기타 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근로 능력이 없는 사람 중에서 부양 의무자가 없는 사람 등이다. 한편 1968년 「자활지도사업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근로 능력이 없는 영세민들에게 근린 구호를 실시하게 되었다.
의료보험은 1976년 12월 22일 제정된 「의료보험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 시행령과 시행 세칙 제정이 늦어져 사실상 1978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의료보험은 국민의 질병·사망·부상·분만 등에 대해 보험 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 보건을 향상시키고 사회 보장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1종과 2종으로 구분하여 시행하고 있다.
[주요 사건·사고·재해]
1. 다이호마루 사건
1953년 2월 4일, 비양도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해 조업하던 80톤 급 일본 어선 제1·2 다이호마루가 군경합동추격대에 나포됐다. 이 과정에서 제1다이호마루호 선원 1명이 추격대의 경포에 맞아 사망했다. 이 사건은 곧 국제 문제로 비화되면서 한·일 관계가 한달 가량 긴장 상태를 지속했다.
이 사건은 보고받은 일본은 한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하면서 일본 외무차관이 한국에 경제적 보복을 가해야 한다고 발설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갑자기 경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본 언론들의 일방적인 편파 보도로 양국 국민의 감정을 자극시켰다.
이에 2월 22일 주일대표부 김용식 공사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얼마 후 UN군 총사령부도 ‘일본 어선은 한국 방위수역 안에는 출입을 허가할 수 없다’고 밝히고 일본 측에 이를 철저히 준수해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에 강력히 반발했고 이와 때를 같이 해 한국의 진헌식 내무장관은 ‘영해를 침범하는 외국 선박은 모두 나포하겠으며 필요시에는 발포까지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억류됐던 다이호마루호와 어부 21명은 양국간의 외교 교섭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됐다.
2. 사라호 태풍
1959년 9월 16일 밤부터 다음날 17시까지 12시간 동안 광복 이후 최대 규모의 사라호 태풍이 북제주군을 비롯한 전도를 강타하였다. 평균 풍속 33.5m에 239㎜의 강우량을 동반한 사라호 태풍은 17일 상오 5시부터 7시까지 2시간 동안 최대 풍속이 39.2m에 이르러 모든 기능을 마비시켰다.
초가지붕이 날아가고 돌담이 무너져 주민들은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파도는 항구와 포구를 삼킬 듯 요동을 쳤고 건천은 물이 넘쳐흘러 거리와 마을이 바다 속에 잠긴 듯 했다.
사라호 태풍은 본도에 엄청난 피해를 남긴 후 북상하여 17일 오후 6시를 기해 하룻만에 해제됐다. 하지만 피해는 엄청났는데 북제주군 지역인 경우 이재민만 애월 7,650명·한림 6,990명·한경 3,705명·조천 3,473명·구좌 4,695명·추자 729명 등으로 나타났다.
3. 중공기 우도 불시착
1961년 9월 15일 오후 7시 30분 국적 불명의 비행기 1대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소섬 북서마을 주흥동 근처 조밭에 착륙을 시도했다. 이 중공기에는 소희언 조종사(당시 29세)와 조종사 견습을 받고 있던 고우종 부조종사(당시 23세) 등 2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중공기의 불시착 사실은 기상 악화로 인해 상부에 즉각 보고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과 출장소 경찰관들은 17일까지 이틀간 번갈아가며 조종사와 기체를 감시해야 했다. 17일 오후 날씨가 다소 풀리고 바람도 수그러들자 제주도 경찰국장 등 관계자들이 소섬으로 들어와 이들을 연행해갔다.
그러나 기체는 불시착 현장이 조밭에 그대로 남겨뒀다. 이튿날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은 중공기 불시착 사실을 한국에 귀순해온 것으로 공식 발표했다. 이 발표는 당시 냉전 시대의 상황에서 세계적인 뉴스로 등장했다.
4. 1960년 말 대폭설
역사상 처음으로 직선 도지사를 뽑던 1960년 말의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민선 도지사 선거를 이틀 앞두고 12월 27일부터 휘몰아치기 시작한 눈은 쉬지 않고 계속 내려 하룻밤 사이 무려 1m정도나 쌓여 차량 통행이 거의 두절되었다.
이로 인해 29일 처음으로 실시된 도지사 선거는 기권자가 많이 생겨 투표율이 63.2%로 역대 선거를 통틀어 가장 낮았다. 폭설은 31일에도 계속 쏟아져 개표 작업마저 지연됐다. 이 때문에 29일 치러진 도지사 선거 결과는 해를 넘긴 1961년 1월 2일에야 확정됐다.
그해 내린 폭설은 초속 15m의 강풍까지 동반해 기온을 영하 3도로 급강하시킬 만큼 가히 살인적이었다. 이로 인해 구좌면 김녕리에서는 사냥을 나간 주민 2명이 눈속을 헤어나지 못해 목숨을 잃었으며, 조천면 신촌리에서는 60대 축우상이 남의 집에서 잠을 자다 얼어 죽었고, 조천면 교래리에서는 친척 집에서 과세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20대 청년이 바로 마을 입구 길가에 쓰러져 동사했다.
5. 추자도 간첩 침투
1974년 5월 20일 밤 추자도에 무장 간첩단이 침투했다. 일단의 무장 간첩들은 우리 측 군경들을 사살하고 도주, 또 한번 도민들을 분노시켰다. 당시 도민들에게는 1973년 3월 4일 새벽 우도에 무장 간첩 2~3명이 출현, 해초 건조장 경비원에게 총격을 가한 뒤 도주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날 밤 간첩과의 교전에서 우리 측에서는 경찰관과 면 직원 2명과 방위 소집자 2명 등 모두 4명이 전사했으며 3명이 부상을 당했다. 무장 간첩들은 수류탄과 초기, 무전기 등을 대량 휴대하고 있었는데, 아군은 사살된 1명의 무장 간첩으로부터 북한제 권총, 수류탄, 무전기, 칼, 위조 주민등록증, 현금 10만 원 등을 노획했다. 1975년 5월 무장 간첩에 의해 희생된 전사자들을 위로하고 면민들의 반공 의식 고양을 위해 반공탑이 세워졌다.
6. 외국산 육우 집단폐사
1979년 9월 하순 북제주군 조천읍 대흘리 소재 가림목장에서 육성하던 호주산 육우 121마리가 떼죽음을 당해 축산 농가와 당국을 긴장시켰다. 이 소들은 가림목장주 백모씨가 그해 6월 22일 호주에서 들여온 271마리 육우들이었는데 3개월 동안 무려 121마리가 갑자기 폐사했다.
7. 집중 호우 제주 급습
1985년 6월 21일부터 28일까지 제주 전역에 600~700㎜의 집중 호우가 쏟아졌다. 이에 도내 곳곳이 8일간이나 물바다를 이뤘는데 북제주군 지역에는 무려 700㎜가 넘는 비가 내렸다. 이 같은 집중 호우가 제주도 등 관계 당국의 예방 활동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피해를 몰고 왔다.
24일 오후 5시부터는 제주시~조천면 고래리 간 교통이 전면 통제됐다. 25일에는 북제주군 조천면 함덕리에서 초가가 무너져 내리면서 전파됐으나 다행이 인명 피해는 없었다. 21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집중 호우는 28일에 들어서야 겨우 멈췄다.
7. 추자도다리 붕괴
1993년 4월 11일 오후 1시 25분쯤 15톤 덤프트럭이 건너는 순간 상·하추자를 연결하는 추자도다리가 하중을 견디다 못해 붕괴됐다. 이 추자교는 1972년 총연장 156m, 폭 3.4m로 완공된 것으로서 1989년에 안전 진단을 실사한 결과 노후하여 붕괴 위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국은 그해 10월부터 4.5톤 이상의 차량 운행을 금지하고 1990년 8월부터 2개월여에 걸쳐 보수 공사를 실시했었다. 이날 다리 붕괴 사고로 차에 동승했던 현장 직원 2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운전자는 추락 직후 헤엄쳐 나와 생명을 건졌다. 경찰 수사 결과 당시 사고 차량은 다리가 노후해 4.5톤 분량의 시멘트 골재 8개를 실어 무려 15톤의 무게로 영흥리에서 묵리 방향으로 운행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제주군은 사고 후 붕괴 다리에 대한 한국건설안전기술원 교량안전진단반의 조사를 거쳐 그해 5월 말까지 응급 복구 작업을 마치고 6월부터 주민 통행을 재개하였다. 한편 이 사고를 계기로 당시 건설 중이던 추자교 대체 공사는 당국의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활기를 띠게 됐다. 이에 따라 새로운 대체 다리는 사고 발생 2년 후인 1995년 4월 27일 완공돼 개통을 보게 되었는데. 신(新) 추자교는 총연장 212m, 폭 8m로 차량 통행에 제한을 두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건설되었다.
[산업과 경제]
북제주군은 한라산을 중심하여 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땅의 경사면에 따라 토양 조건과 기상 반응이 각기 다르므로 자연 식생이 아주 다양하다. 기후는 온대남부형에 해양성을 곁들이고 있다. 비는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많이 내리나, 바람이 거칠어 수차례의 태풍이 내습한다.
토질은 화산회 토양으로 자갈과 돌이 많아서 농경에 어려움이 크다. 따라서 농업은 주로 밭농사와 채소 재배를 하고 있으나 점차 감귤생 산지가 확대되면서 고소득 경제 작물로 큰 몫을 해오고 있다.
또한 한라산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내려오면서 넓게 펼쳐진 목야는 천연적인 축산의 적지로서 넓게 펼쳐진 목야는 천연적인 축산의 적지였다. 1960년대 이후, 초지 개량사업과 함께 육우와 유우 입식, 낙농 진흥 등 축산종합개별계획을 추지하여 대단위 관영 목장, 기업 목장, 그리고 마을 공동 목장들이 많이 발전함으로써 제주도 축산업의 진흥을 가져왔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대륙붕이 넓게 퍼져 있을 뿐 아니라 따뜻한 난류가 흘러서 정착성 어종과 회유성 어족이 풍부한 어장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자연 환경 속에서 북제주군의 수산업은 1960년대 이후 어업 개발과 어업 전진 기지, 어선의 동력화·대형화, 양식 어업 등 어업 근대화 사업을 꾸준히 추진하면서 제주도 수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섬이 지닌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옛 탐라의 역사가 깃든 고유한 민속 문화로 하여 관광성이 높다. 특히 북제주군은 만장굴을 비롯하여 협재굴 및 협재해수욕장, 함덕해수욕장 등을 중심으로 1970년 이후 관광 기반인 도로, 교통, 통신, 용수, 전력 등은 물론 관광 수용 시설들이 갖추어지면서 관광 주도형의 제주 지역 개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제주도 및 북제주군 지역 경제는 1946년 8월 1일 제주도가 전라남도 행정 구역에서 분리되면서 독립적인 경제 단위로 성립되었다. 제주도 및 북제주군 지역 경제는 그동안 엄청난 양적 팽창과 질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한 자연적 고립은 제주도를 주류로부터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제주도 및 북제주군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북제주군을 포괄할 제주 지역 경제는 1960년대 초부터 경제 개발에 착수한 이래 시행 착오를 겪은 바 있으나, 1970년대 이후 관광 주도형 지역개발정책을 추진한 결과 관광 산업을 기반으로 구축하여 제주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1970년대 이후 관광 산업과 농업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여 제주 경제의 양적 규모 증대는 물론, 산업 구조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개방 경제 시대를 맞아 제주도내 주력 산업인 농업·관광 산업을 비롯하여 건설업, 유통업 등의 시장 개방에 따라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지역 경제의 적응 위기를 맞게 되었다. 더구나 2000년대 국제자유도시 경제시대에 들어서면서 글로벌 경쟁시대를 맞아 기본 주력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신성장산업 육성이 지역 경제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이처럼 북제주군이 독립적인 지역 경제로 성립된 후 지역 경제는 엄청난 구조 변화 및 발전을 경험하였다
[지역 개발]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데서 오는 자연적 고립은 제주도를 국가 생활의 주류로부터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제주도는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부존된 농림, 축산, 수산, 관광 자원이 활용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일반적인 개발만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기점으로 하여 도로 확장, 용 개발, 전력 개발, 항만 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됨으로써 산업 경제의 생산 기반이 구축되었고, 관광 개발이 촉진됨으로써 제주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룩되어 왔다. 1971년에 확정된 국토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관광지 개발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간선도로의 포장·확장, 제주공항의 확장 및 보잉 여객기 취항, 제주항의 확장 및 카페리 취항, 통신망의 구축 등 각종 기반시설이 확충·정비되어 왔다. 이후 「제주도개발특별법」에 의한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이 시행됨으로써 21세기를 지향한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관광과 그 지리적 요건]
북제주군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제주 관광의 핵심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지형적으로 제주도의 북쪽에 자리 잡고, 한라산 정상을 중심으로 제주시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족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제주해협을 건너 본토의 육지부와 마주하고 있다.
북제주군은 바다와 해안선, 밭, 초원, 산림, 동굴 그리고 산이 여러 겹으로 조화를 이루어 관광성이 높은 고장이다. 한라산 백록담을 중심으로 분화구를 지닌 기생 화산들이 펼쳐질 뿐 아니라 풍부한 동식물을 거느린 산림과 계곡, 구릉과 초원, 동굴 등이 천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바닷가의 해수욕장과 기암, 그리고 여러 도서들은 빼어난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산과 들, 바다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산업들도 제주 고유의 향토색을 짙게 한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경작하는 토착 농업, 그 가운데서도 유채, 감귤, 채소류, 특화 작물 등의 관광 농업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목장들과 표고버섯을 포함한 임업, 그리고 바닷가와 섬의 포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어업은 매우 관광적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북제주군은 제주시 분리 이전의 목관과 수부를 거느렸던 당시의 문화성을 잃지 않으면서 제주도의 다른 어느 시군보다도 옛 그대로의 산업 문화와 생활 문화를 간직한 고장이다. 특히 여러 용암동굴과 분화구 등은 북제주군이 자랑하는 관광 자원이다. 제주도가 세계적으로 내세울만한 관광 자원이 용암동굴임을 헤아릴 때 북제주군은 이점에서 관광 제주의 핵심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북제주군은 한라산 백록담을 꼭지점으로 하여 동북과 서북으로 뻗어내리면서 오름과 산림 지대 그리고 넓은 목장들을 이루어 제주도의 3대 목장(제동목장·송당목장·이시돌목장)이 시설되어 있고, 해안 쪽으로 관광지가 잘 발달되어 있다. 함덕, 김녕, 곽지, 협재해수욕장 등 제주도의 대표적 해수욕장이 여기에 있음은 물론 여기저기 흩어진 도서들은 그 경관과 함께 바다낚시 등 해양 관광의 무대로서 가치가 크다. 그런가 하면 겨울철새의 도래지도 북제주군의 동서 해안에 집중되고 있다.
북제주군은 많은 유적과 전설지들을 비롯하여 옛 민속을 간직한 지역이다. 제주 민속의 바탕이라고 할 제주 무속의 발상지이기도 한 북제주군에는 풍어를 비는 영등굿 등 풍부한 무속과 민속놀이들이 전해진다. 한편 민속적인 살림 못지않게 제주 고유의 농업, 어업, 축산업 등 토착 산업도 크게 발전한 곳으로 관광성이 높고 이러한 특성으로 해서 관광 특산 명물들도 많이 생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