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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699
한자 林亨秀
영어음역 Im Hyeongsu
이칭/별칭 사수(士遂),금호(錦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찬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제주목사
출신지 전라남도 나주
성별
생년 1504년(연산군 10)연표보기
몰년 1547년(명종 2)연표보기
본관 평택(平澤)
대표관직 제주목사|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수찬|회령판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

[정의]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아버지는 북병사(北兵使) 임준(林畯), 어머니는 현감 권석(權錫)의 딸이며, 동생에 임길수(林吉秀)[1529~?]가 있다.

[활동사항]

1531년(중종 25) 진사가 되고, 1535년(중종 3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 춘추관기사관, 세자시강원사서 등을 지냈다.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 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한 뒤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수찬, 회령판관 등 내외직을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9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1546년(명종 1) 10월 파면되었다. 제주목사 재임 중에 공무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집행하였다. 1547년(명종 2) 외척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소윤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때 대윤 윤임(尹任)의 일파로 몰려 절해고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1567년(선조 즉위년)에 신원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하였으며, 이황(李滉)[1501~1570], 김인후(金麟厚)[1510~1560] 등과 친교를 맺어 학문과 덕행을 닦았고, 문장에 뛰어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에 『금호유고(錦湖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1850년 봄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임형수의 업적을 기려 전 제주목사 이예연(李禮延)[1767~1843]과 함께 영혜사(永惠祠)에 제향하였으며, 1702년(숙종 28) 전라남도 나주에 있는 송재서원(松齋書院)에 제향되었다. 1796년(정조 20)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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