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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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음역 | 3·1 Undong |
영어의미역 |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완회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4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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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독립운동|항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이범우 |
[정의]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충청북도 제천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제천은 항일 의병의 전통이 있는 곳이었으므로 일제에 대한 저항감이 높았다. 무단 통치를 겪으면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전통적인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으로 인하여 고종(高宗)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정서가 높았다. 이러한 가운데 신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만세 운동을 주도하면서 규모가 확산될 수 있었다.
[경과]
제천군의 잠업계 잠업 조수였던 이범우(李範雨)는 고종의 인산에 참여할 제천군 대표로 뽑혔다. 상경한 이범우는 일주일 동안 서울에서 머물면서 숭인동에 있던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만나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아 동참하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받은 이범우는 검문을 피하기 위하여 차편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강원도를 경유하여 귀향하였다. 도중에 처가인 횡성, 그리고 원주에 들러 지인들을 만나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열흘 만에 제천에 도착한 이범우는 권종필(權鍾弼)·이기하(李起夏)·전필현(全弼鉉) 등 가까운 친구들과 만세 운동을 모의하는 한편 부명보통학교 후배인 장두성(張斗星)을 단양으로 보내어 봉기를 부추기고 영월 금마리에 사는 차은성(車銀成)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하여 금마리 만세 운동을 촉발시켰다.
제천에서의 만세 운동은 제천 장날인 4월 17일로 예정되었다. 하루 전날 부명보통학교 후배들과 함께 하소동의 옹바위 아래에서 태극기를 만들던 장용근(張龍根)·이선동(李先童)·이기택(李起澤) 등이 16일에 체포되고 1,200여 개의 태극기가 압수되었다. 그러나 이범우 등은 예정대로 만세 운동을 결행했다. 1,000여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고 부명보통학교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날 이범우 외에 권종필·이기하·전필현 등의 주모자가 모두 체포되었고 수비대의 총격에 의해 여러 명이 부상당하고 이맹삼(李孟三)·이화춘(李化春)·이윤용(李允容)·박성일(朴聖日) 등이 사망했다. 이튿날에는 송학면에서 최종률(崔鍾律)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이틀에 걸쳐 만세를 부르고 면장에게 만세 운동에 참여하도록 요구하다가 검거되었다. 청풍에서는 면민들과 청풍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팔영루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결과]
이 운동의 과정에 장용근·이선동·이기택·이범우·이기하·권종필 등 여러 명이 투옥되어 징역형을 받았고, 검거된 여러 학생이 태형을 받았다. 그밖에도 서울에서 만세 운동에 가담했던 권희목(權熙穆), 영월에서 만세 운동에 가담했던 남상은(南相殷)도 옥고를 치렀다. 김진목(金鎭睦)은 만세 운동 후에 상하이[上海] 임시 정부로 가 독립 운동에 몸을 바쳤다.
3·1 운동이 무력에 의해 진압된 후, 관련자들은 처벌 받았고, 오랫동안 그 기억은 은폐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희생자들의 신원조차 대부분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제천의 3·1 운동은 충청도 북부 지역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원주나 영월 등 영서 지역의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