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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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風流家-音樂會-堤川淸風寒碧樓 |
영어의미역 | Hanbyeongnu Pavilion in Cheongpung, the Moonlit Concert of a Romantic Joseon Musici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창식 |
[개설]
제천 청풍 한벽루는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의 상징이자, 비봉산과 청풍강이 어울려 있는 명당 중에 최고 명당에 자리한 누각이다. 본래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淸恭)이 고려 충숙왕 4년인 1317년에 왕사(王師)가 되어 청풍현이 군(郡)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 동쪽에 세운 건물로서, 원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다. 1983년 청풍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청풍면 물태리[현 청풍문화재단지 내]로 옮겨 세웠다. 제천 청풍 한벽루는 본채 옆에 작은 부속 건물이 딸려 있는 형태이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증(金壽增)의 편액이 있으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제천 청풍 한벽루(淸風 寒碧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영남루[보물 제147호],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조선 시대 누각의 대표적인 예로 지칭되는 제천 청풍 한벽루는 1971년 1월 8일 보물 제528호로 지정되었는데, 영남루와 광한루에 비해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누각 위에 있는 중수기(重修記)로 보아 1406년(태종 6) 군수 정수홍(鄭守弘)이 중수하고, 1634년(인조 12)에 개창하였다. 이후 1870년(고종 7)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하였으며, 1972년 8월 19일 수해 때 붕괴된 것을 1976년 4월에 다시 복원하였다.
[조선의 품격이 살아 있는 고려 시대 유물]
제천 청풍 한벽루는 본채 옆에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단층 팔작지붕 형태이다. 본채는 앞면 4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 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날개 모양의 난간]으로 건물을 연결하였다. 자연돌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세웠다. 누의 공포는 이익공(二翼工)이고 익랑은 초익공(初翼工)이며, 누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나 익랑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동측 합각 밑을 가리기 위해 우물천장을 일부 가설하였다.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두른 데서도 알 수 있듯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어 조선 선비의 풍류 미학이 스며 있다.
하륜(河崙)이 쓴 「청풍 한벽루중신기(淸風寒碧樓重新記)」에는 청풍 한벽루를 중수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옛날에 여러 번 죽령 길을 지난 일이 있었는데, 청풍군수가 매양 길가에 마중 나와 주므로, [그 지방] 산수의 형세를 물으니, 한벽루(寒碧樓)를 칭하고, 또 주문절공(朱文節公)의 4구시를 외워 주었다. 나는 듣고 즐겁게 여겼으나 항상 바빠서 한 번도 들어가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군수 정수홍 군이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청하기를, ‘이 고을 한벽루가 온 고을에서 이름이 나 진실로 경치가 기절한데, 수십 년 이래로 비가 새고 바람이 들이쳐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군에 도임하여 다행히 나라의 한가한 때를 만났기에, 금년 가을에 공인(工人)을 청하여 수리하여, 들보나 기둥이 썩고 틀어진 것은 모두 새 재목으로 바꾸었는데, 다만 갑자기 겨울이 닥쳐서 단청만 못했을 뿐입니다. 청컨대 그대는 기문을 만들어서 뒷사람에게 보여 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누관(樓觀)을 수리하는 것은 수령의 말단적인 일이지만, 그 홍폐에 있어서는 실로 세도(世道)와 더불어 관계가 된다. 세도가 오르내리므로 백성의 휴척(休戚)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누관의 홍폐도 따르게 되는 것이니, 어찌 이보다 더 상관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지금 이 누가 수십 년 동안 무너지고 썩어 오다가 정군이 행정하는 날을 당하여 다시 새롭게 되었으니, 비록 정군의 포치(布置)에서 나온 것이지만 가히 세도가 수십 년 전과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군·현에 아직도 수리하지 못한 누관이 있음을 볼 때 어찌 꼭 세도의 탓이라고만 하겠는가. 정군 같은 이는 세도를 기본으로 하여 정치를 하는 이라 이를 만하다. 내가 옛날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정군은 한창 안성(安城)을 다스려 명성이 가장 으뜸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그의 사람됨을 알았었고, 그 후 두 번 내 집에 들렀기에 나는 손님을 대하는 예로 대접했었다. 지금 간곡히 청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써서 기를 하는 것이다.
그 산수의 승경과 구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자상히 알 수 없으나, ‘청풍(淸風)’이나 ‘한벽(寒碧)’이란 이름만 들어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뼈끝까지 서늘하게 한다. 훗날에 혹시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노니려는 계획이 이루어져서, 다시 죽령의 길을 지나게 되면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한번 들어가 구경하고, 문절공(文節公)의 시를 읊으면서 수백 년 전의 그 인물을 상상하며 또 그대의 유애(遺愛)에 대하여 시 한 편을 짓고 떠나가리라.”
[한벽루는 대표적인 조선 시대 문인들의 시회(詩會) 장소였다]
한벽루는 청풍면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특히 조선 시대 문인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는 건물 안에 있는 송시열과 김수증 등의 편액에서도 직접 확인할 수 있으며, 현판의 글씨를 통해서는 김정희의 풍류까지 엿볼 수 있다. 절경과 예술이 만나 이루어 낸 장소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 제천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활동했던 권섭(權燮)은 한벽루에 올라 시조를 지었다. 아래 권섭의 시조와 한시는 2004년에 발간된 『제천시지』에 수록된 것으로, 최대한 원문을 살려서 직역하였다.
「꿈에 한벽루에 올라」-권섭
꿈에 한벽루 올라 금병산 바라보니/ 청강(淸江)에 빗쵠 달과 오동(梧桐)에 부난 바람/ 가져다가 사해(四海)에 난화 고로두케 하소셔
「한벽루에서 사암의 현판 운에 차하다」-권섭
강물에 백 년 수심을 띄워 보내니/ 상쾌한 바람 먼저 한 누대로 모이네/ 열두 난간 머리에 피리를 부는데/ 벽오동 달에 맑은 가을 가까웠네
권섭만이 아니라 한벽루에 올라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고려 시대의 이익과 주열(朱悅), 조선 시대의 이승소(李承召)·서거정(徐居正)·하륜·정약용(丁若鏞)·유운(柳雲)·유성룡(柳成龍)·허균(許筠)·이긍익(李肯翊)·송시열(宋時烈), 이산해(李山海), 김시양(金時讓), 이첨(李詹), 박순(朴淳) 등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 찾아와 그들의 마음을 시문으로 남겨 놓았다. 한벽루 자체가 살아 있는 풍류 시문 박물관인 셈이다.
「한벽루운」-이산해
옥 난간에 흐르는 기둥, 강물을 베개 삼았는데/ 승경은 호서 제일이라/ 강 숲에 모인 흰 구름 말을 매어 둔 듯/ 여기저기 봉우리엔 잔설, 다시 누에 오른다
「한벽루운」-김시양
진실을 찾아 푸른 시냇물 좇았는데/ 두루 산천을 다녀 보니 천하제일 고을이라/ 천리 먼 길 행장 잠 이루지 못해/ 오경에 잔월 깃든 누대에 홀로 오르네/ 강성에 봄은 늦어 꽃은 바다 같고/ 포구 끝에 바람 부니 물결은 배를 흔드네/ 다만 퉁소 불고자 우객을 좇으니/ 어디인지 알지 못하겠네, 이 바로 바로 영주라
선인이 허리에 찬 패옥 쟁글쟁글/ 높은 누에 올라서 푸른 창에 걸었네/ 밤 깊어 다시 유수곡을 타니/ 한 바퀴 밝은 달 가을 강에 내려오네/
나그네 마음 외롭고 아득하여 절로 시름 일어/ 앉아서 강물 소리 들으며 다락을 내려가지 않네/ 내일이면 또 벼슬길에 올라 길 떠나리니/ 흰 구름과 단풍은 누굴 위한 가을인고
「한벽루」-이승소
옥색의 아득히 높은 난간 푸른 물결에 떠 있고/ 봉호 비밀스런 골짝이 아닐까/ 공중에 잠긴 물결 빛 맑게 대자리에 흔들리고/ 절벽을 격해 산빛 푸르게 누대 채우네/ 떨어지는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시냇가 물새 찾으며/ 배 저으며 별표로 돌아오는데 고깃배 뒤따르네/ 훗날 기러기 백로 부러워하며 길이 주인 되어/ 맑은 모래 십 리 물가에서 노닐고자 하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등이 다녀가면서 수많은 그림을 남기기도 한 한벽루는 청풍 한벽(淸風 寒碧)의 자연관이 함축되어 전하는 곳이다. 조선 시대 시인·묵객들의 시회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곳으로 충청 지역 선비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지금도 남한강 물길을 따라 절경을 감상하며 시를 나누는 풍류 시인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