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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20
한자 金大德
영어음역 Gim Daedeok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지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77년연표보기
몰년 1639년연표보기
본관 광산
대표관직 형조참판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시조는 신라의 왕족인 김흥광(金興光)이다. 고려 초기부터 명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광산김씨는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 형제 대(代)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 산맥으로 분파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급제자가 배출되었으며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이 나왔다. 김흥광의 26세손인 김대덕(金大德)[1577~1639]은 16세기 중엽쯤에 광명에 입향하였으며, 양부(養父)인 김원록과 함께 현재의 광명시 일직동 자경마을에 정착하였다. 이후 김원록은 돈령공파(敦寧公派)의 파조가 되고, 김대덕은 소봉공파(蘇烽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활동사항]

김대덕은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이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이듬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1603년(선조 36) 대교가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키려는 폐모론에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 후 사간원사간이 되어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하려 한 사간원대사간 유백증의 사친추숭(私親追崇)에 대하여 잘못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주화파(主和派)는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고 주전파(主戰派)는 결사 항전을 주장할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인조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전란 후 청과의 외교적 화를 막을 수 있었다. 벼슬은 한성좌윤과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학문과 사상]

저자 미상의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된 『응천일록(凝川日錄)』은 신하들의 상소문 등이 기록된 자료로 1630년(인조 8) 2월 2일자 기록에 김대덕을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내는 사신으로 추천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기록에는 “현존하는 사람 중에서 가리자면 글재주와 꾀가 있고 충실하며 일에 익숙한 사람으로는 김대덕 만한 사람을 실로 얻기 쉽지 않으나”라고 하여 김대덕의 학문과 충실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한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시 보여 준 폐모론의 반대 상소 내용은 그의 기개와 꿋꿋함과 보여주는 일례로 판단된다.

[저술 및 작품]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장유(張維)[1587~1638]의 시문집인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25권, 29권, 31권에 시문이 있다. 그리고 1638년(인조 16)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반월리에 세워진 김강(金綱)[1489~1555]의 묘갈에 김대덕이 지은 비문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산6번지에 있으며 석비와 상석, 동자석이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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