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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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碩期 |
영어음역 | Gang Seokgi |
이칭/별칭 | 복이(復而),월당(月塘),삼당(三塘),문정(文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동인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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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 |
성별 | 남 |
생년 | 1580년 |
몰년 | 1643년 |
본관 | 금천 |
대표관직 | 우의정 |
[정의]
조선 후기 광명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복이(復而), 호는 월당(月塘)·삼당(三塘). 고조할아버지는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강숙돌(姜叔突)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 강뢰(姜賚)이며, 할아버지는 삼등현령(三登縣令) 강유경(姜惟慶)이고, 아버지는 이조참의 강찬(姜燦)이다. 어머니는 광주김씨(廣州金氏)이며, 외할아버지는 첨지(僉知) 김은휘(金殷輝)이다. 부인은 고령신씨로 공조참판을 지낸 용졸재(用拙齋) 신식(申湜)의 딸이다. 백부(伯父)인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강순(姜焞)에게 입양되었다. 아들로 강문두(姜文斗)·강문벽(姜文壁)을 두었다.
[활동사항]
강석기(姜碩期)[1580~1643]는 지금의 광명시 학온동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론(禮論)을 수업하고,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1인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대북파(大北派)의 권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자는 의논을 일으키자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불만과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려는 뜻을 버렸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예문관(藝文館)에 천거되었으나 친혐(親嫌)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이해에 경연에서 『논어(論語)』를 진강하였다.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를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병조좌랑을 역임하고 사간원의 정언(正言)·헌납(獻納)·사간(司諫),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校理)·응교(應敎)·전한(典翰) 등을 지냈다. 얼마 뒤 성균관의 직강(直講)·사예(司藝)·사성(司成), 이조좌랑·이조정랑·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종부시(宗簿寺)·예빈시(禮賓寺)·장악원(掌樂院)·제용감(濟用監) 등의 정(正)을 지냈고, 겸직으로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문학(文學)·필선(弼善)·보덕(輔德)과 교서관의 교리·문신선전관(文臣宣傳官)·외지제교(外知製敎) 등을 지냈으며, 뒤에 외직으로 나가서도 항상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는 강관(講官)으로 활약하였고, 대간으로 있을 때는 기강을 진작시키고자 목성선(睦性善)·유석(柳碩)·황호(黃㦿) 등이 붕당(朋黨)을 사사로이 만들어 교란하는 폐해를 지적하였으며,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의 예론(禮論)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627년(인조 5) 후금(後金)과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간쟁(諫爭)을 격렬히 하였고, 강홍립(姜弘立)의 처형을 주장하였던 윤황(尹惶)을 극력 변호하다가 양근군수(楊根郡守)로 좌천되었다. 이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던 1627년 9월에 강석기의 둘째 딸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으로 간택되어 12월에 가례(嘉禮)를 올렸으며, 병조참지·병조참의·사간원대사간·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28년(인조 6) 승정원도승지에 올라 목릉(穆陵)을 개봉(改封)하는 일에 참여한 뒤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내의원부제조(內醫院副提調)로서 자전(慈殿)을 시약(侍藥)한 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가 가자(加資)되었다. 이후 이조와 병조의 참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으며, 인목대비의 산릉(山陵)을 봉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서 승정원도승지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서 예조판서·좌부빈객(左副賓客)에 제수되었다.
1633년(인조 11) 사헌부대사헌으로 원종대왕(元宗大王)을 종묘에 제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직이 삭탈되었다. 1635년(인조 13) 방면(放免)을 얻고 돌아와 이듬해 원손(元孫)이 태어나자 다시 서용되어 벼슬이 예조판서를 거쳐 1636년(인조 14)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병자호란 때는 왕명에 따라 세자빈을 강화도에 피난시켰다.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게 함락되자 세자빈을 보호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나와 왕을 맞이하였다.
이후 중추부(中樞府)에 나아갔다가 1640년(인조 18) 봄에 우의정에 올라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다. 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의 뜻을 진정하여 겨울에야 재상과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그만두었고, 얼마 후 영부사(領府事)에 올랐다. 병이 깊은 끝에 1643년(인조 21) 6월 13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강석기의 사후 3년 뒤인 1646년(인조 24) 3월 왕의 총비(寵妃)인 조소용(趙昭容)의 무고(誣告)와 간흉(奸凶) 김자점(金自點)의 책동으로 민회빈 강씨가 심관(瀋館)에서의 영리(營利)[뇌물 외교에 소요되는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로 인조의 불평과 역위(易位)를 꾀한다는 의심을 받던 중, 세자가 부왕에 의하여 독살된 뒤 강빈(姜嬪)도 저주 사건[역모]의 주도자로 모함되어 사사되었다. 그것을 ‘강빈의 옥’이라 하는데, 강빈옥사(姜嬪獄事)가 일어나자 강석기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고, 70세의 부인 신씨(申氏)와 강문두·강문벽 등 두 아들과 가족이 장살(杖殺)되었다. 1717년(숙종 43) 김창집(金昌集)의 발의와 증손 강봉서(姜鳳瑞)의 격쟁으로 강빈의 신원(伸寃)과 함께 강석기도 복관(復官)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월당집(月塘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학온동 142번지[옛 시흥군 서면 노온사리]에 있다. 이식(李植)이 묘지(墓誌)를 짓고 정홍명(鄭弘溟)이 묘표(墓表)를 지었으며, 이명한(李明漢)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신도비의 명(銘)은 신익성(申翊聖)이 짓고, 민병승(閔丙承)이 글씨를 썼으며, 김용진(金容鎭)이 전자(篆字)를 썼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718년(숙종 44) 황해도 봉산군 토성면 무정리에 있는 문정서원(文井書院)에 이이, 김장생·김집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