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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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영어의미역 | Geumnyeong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집필자 | 권만용 |
세거지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노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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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노리실 |
입향시기/연도 | 17세기 |
성씨시조 | 김시흥 |
입향시조 | 김순종 |
[정의]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김순종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연원]
김녕김씨는 영돈녕공준파(領敦寧公遵派), 진주목사공형파(晉州牧使公炯派), 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 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 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 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 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 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절의 두 명, 공신과 판서 및 기타 관직에 31명을 배출하였다.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39세손이자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고,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김시흥을 시조로 삼고 김녕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어 본관도 김해로 바꾸었으나 김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됨에 따라 김해김씨를 선김(先金), 김녕김씨를 후김(後金)으로 불렀다.
고려시대에 김상은 병부상서를 지냈고, 김극세(金克稅)는 공부시랑, 김중원(金重源)은 형부시랑, 김현(金峴)은 문하시랑을 지냈다. 조선시대 들어 김광저(金光儲)는 사헌부대사헌, 김순(金順)은 호조판서, 김관(金觀)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공조판서·이조판서·형조참판·함경감사·함길도도절제사 등을 지낸 김문기(金文起)는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받고 세조 즉위 후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형장에서 순절하였다.
김응수(金應壽)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형제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공로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으며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충효공(忠孝公) 김유부(金有富)는 팔공산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고, 김유부의 아들 김기남(金起南)과 김난생(金蘭生)은 병자호란 때 순절하여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담양부사 김언공(金彦恭)은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방어하고 섬진강에서 청군을 막았으며 노량대첩 때에는 충무공의 진중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입향경위]
『김녕김씨대동보(金寧金氏大同譜)』에 따르면 김시흥의 17세손 충의공파 김순종(金舜鍾)이 17세기 무렵 광명시 가학동 노리실에 처음 정착하였다. 김순종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김지일(金枝鎰)은 승정원좌승지를 지냈고 인천으로 분가했다. 김지일의 아들 김익연(金益演)은 이조좌랑을 지냈고, 김익연의 아들 김처철(金處哲)과 김처일(金處逸)은 진사, 김선철(金膳哲)은 현령을 지냈다. 김시흥의 24세손 김세권(金世權)은 조선 후기 영의정에 올랐다.
[현황]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11월 당시 경기도 광명시에 거주한 김녕김씨는 총 444가구에 1,758명, 2000년에는 931가구에 2,933명이었다. 2006년 현재 광명시 가학동 노리실에 약 30가구가 세거하고 있으며, 매년 3~4회 종친회를 개최하고 있다.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는 길일을 택해 당제를 지내다가 나무가 소실되자 마을 앞 산중턱에 당집을 짓고 군웅제를 지내고 있다.
[관련유적]
경기도 안산시에 김녕김씨 사당이 있고, 광명시 가학동 노리실을 둘러싼 작은 산 대부분이 김녕김씨의 종중 땅이라고 하며 산 중턱에는 당집이 있다.